[한경에세이] 예술가에겐 아내가 있다

혼자 잘나서 주연되는 경우는 없어
뒤에서 고생하는 조연들 보살펴야

김혜경 < 이노션월드와이드 전무 hykim@innocean.com >
경기도 양평 서종면엔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다. 파주 헤이리가 알려진 예술가들의 마을이라면 서종면엔 ‘아, 너무 시끄럽거든…’ 하고 일부러 숨어 사는 괴짜들이 많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도 양평주민인 관계로 그런 분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생긴다.

최근엔 매우 유명한 판화작가님과 도예가 선생님 댁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작품들도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대가(大家)들의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작품들을 코앞에서 보는 건 ‘이건 작품입니다’ 하고 얌전히 걸려 있는 미술관의 그것들을 감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그 놀라운 작품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분들의 아내였다. 현실감이 둔하신 남편들이 뭔가 어리바리하고 있으면 어느 틈엔가 나타난 마징가Z나 배트맨처럼 ‘척~’ 하고 일사불란하게 해결하는 그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다. 알고 봤더니 작가들이 ‘남들이 뭐라건 나는 나의 길을 가리라’ 하는 식으로 자기 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건 뒤에서 남편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살피는 아내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1인 4역, 아니 1인 5역이다. 예컨대 현모양처, 매니저, 큐레이터, 마케터, 조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할을 일사불란하게 해내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아내가 거의 똑같은 이력을 갖고 있었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지만 가난한 예술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꿈은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 수십 년을 남편의 손발이 되어 지내다 보니 자신을 감추는 것이 당연해졌지만 예술에 대한 감각과 판단력은 남편보다 오히려 못할 것도 없다는 것. (젊었을 땐 상당히 날리셨을 미모라는 것도 똑같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란 남자들은 상당히 염치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흠~) 어쨌든 남편 그늘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사모님들에 비하면 그녀들은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 씩씩함 뒤에 언뜻언뜻 미련, 아쉬움, 서글픔 같은 감정들이 묻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이만 잘되면 나야 뭐 괜찮아…”라고 다짐하며 남편을 위해 자신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은 별것도 아닌 일로도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주인공을 위해 헌신하는 ‘유능한 스태프’들이 많이 있다. ‘강남스타일’로 엄청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싸이의 ‘말춤’도 개발자는 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가. ‘친구’라는 영화에서 왠지 울컥했던 장동건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주연과 조연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혹시 운 좋게 주연의 자리에 섰다면 나를 위해 애써주고 있는 조연이 누군지 살펴보고 챙겨야 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김혜경 < 이노션월드와이드 전무 hykim@innoce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