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규, 강만수에 "G20 꼭 챙겨라"…정상회의 유치 씨앗 돼
입력
수정
秘史 MB노믹스 (6) G20 서울정상회의 유치
佛, 한국 뺀 G13회의 주장…청와대, 재외공관에 비상령 "G20으로 재편" 설득 지시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 브라질 제안으로 맡아…'서울 회의' 유치 명분 키워
“2010년 11월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하게 됐음을 알려드립니다.”
2009년 9월25일 오전 8시 미국 피츠버그의 데이비드 L 로렌스 컨벤션센터. 이명박 대통령은 전 세계 취재진 앞에서 한국의 G20 정상회의 개최 소식을 알렸다. 2010년 6월 제4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인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다. 지켜보던 정부 관계자들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 만세삼창을 외쳤다.2010년 제5차 G20 서울 정상회의는 ‘한국을 세계사의 객체에서 주체로 격상시킨 쾌거’로 불렸다. 지금도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 ‘경제외교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같은 쾌거가 2008년 2월 신·구(新·舊) 정부의 경제사령탑 인수·인계에서 태동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권오규, 인수·인계 때 조언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나흘 전인 2008년 2월21일 서울 종로구의 한정식집.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와 노무현 정부의 권오규 재정경제부 장관이 마주 앉았다. 장관직 인수·인계를 겸한 오찬이었다. “제 생각엔 G20 재무장관회의가 앞으로 국제금융질서를 주도하게 될 겁니다. 꼭 챙겨보세요.” 권 장관의 말에 강 장관 내정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 장관은 취임 직후 신제윤 재정부 차관보를 불러 “위기때는 대외관계가 중요하니 국제회의에 적극 참여하라”고 지시했다.해외 네트워킹에 주력하던 신 차관보는 5월 초 일본 주재 브라질 대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신제윤의 회고. “브라질 대사가 대뜸 한국이 2010년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을 맡으라고 제안했다.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은 지역별로 회원국이 돌아가며 맡는다. 2010년은 아시아지역의 한국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호주 중 한 나라 차례였다. 호주와 중국은 이미 의장국을 했고, 일본은 2010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유치해 놓은 상태였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남는데, 이번엔 한국이 맡으라는 것이었다.”
신 차관보의 보고를 받은 강 장관은 잠시 숙고한 뒤 “한번 해보자”고 말했다. 석달 전 권 전 장관의 조언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때부터 재정부는 중국 일본 호주 등을 대상으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덕분에 그해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위임대표(deputy) 회의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의장국 지위를 따낼 수 있었다.
◆G13이냐, G20이냐?한국이 2010년 G20 재무장관회의를 유치한 지 두달 뒤인 2008년 9월15일 미국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리먼 파산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고, 각국은 해법을 찾는데 골몰했다. 리먼 파산 9일 뒤인 9월23일 개최된 유엔 총회.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연설에서 “지금 위기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G8에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브라질을 참여시켜 G13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르코지의 제안에 한국은 당황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GDP·국내총생산)로는 세계 12위였다. 그러나 사르코지 대통령이 제안한 G13엔 들어가지 못했다.
비상이 걸린 정부는 주요국 정상회의가 G13이 아닌 G20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10월6~8일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제1회 세계정책콘퍼런스. 글로벌 금융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열린 이 회의에는 주요국 정상과 국제기구 대표들이 참석해 위기 타개 방안을 논의했다. 이 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된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여기서 G20 정상회의 창설을 역설했다. “G8을 개편해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할 때 한국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취한 금융·경제정책을 감안하면 한국은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어 10월17~18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미·유럽연합(EU) 정상회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 등은 G13이냐, G20이냐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결국 주요국 정상회의 참여 범위를 G20으로 결정했다. 정상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G20 재무장관회의의 틀을 활용하자”고 합의한 것. 이런 결론엔 G20이 돼야 우군인 한국 호주 등이 다수 포함될 수 있다는 미국의 정치적 계산이 크게 작용했다.◆G20 재무장관회의가 큰 힘
G20 정상회의 첫 회의는 11월15일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워싱턴에서 긴급 소집됐다. 이어 2차 회의는 2009년 4월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이던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다. 이때 정부는 한국도 G20 정상회의를 유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신제윤의 증언. “G20 정상회의를 열려면 예비회의로 재무장관회의를 갖는다. 2010년엔 어차피 한국에서 G20 재무장관회의를 열기로 돼 있기 때문에 정상회의 유치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노력하면 G20 정상회의를 유치 못할 것도 없다는 게 정부 판단이었다.”
청와대는 2009년 9월로 예정된 3차 G20 피츠버그 정상회의를 앞두고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주요국 재외공관에 G20 정상회의 유치를 위한 설득작업 특명을 내린다. 이 대통령은 사공 위원장을 미국과 중국에 특사로 보내 G20 서울정상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런 유치활동에서 한국이 2010년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이란 점은 큰 힘이 됐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가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이 아니었다면 정상회의 유치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권오규 전 장관의 조언 한마디가 G20 서울 정상회의 유치의 씨앗이 된 셈이다.
G20 정상회의 유치 덕분에 '환율 주권론' 공식 인정받아
각국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같은 국제회의를 경쟁적으로 유치하려는 것은 의장국이 갖는 ‘특권’ 때문이다. 의장국은 주요국 정상을 초대해 세계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 이외에, 세계 경제질서를 결정하는 의제를 주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30일 가진 G20 정상회의 유치 관련 회견에서 “우리는 의장국으로서 의제 설정과 참가국 선정, 합의사항 조정은 물론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제안을 적극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국은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일시적 유동성 부족을 겪는 국가에 신속하게 자금을 공급하는 글로벌 금융안전망, 개발도상국에 대한 선진국의 원조를 양적·질적으로 확대하는 개도국 지원 방안을 이른바 ‘코리아 이니셔티브(한국 선도의제)’로 제시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의장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 한국이 주장했던 ‘환율주권론’도 정상회의에서 인정받았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설명.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정부는 과도한 환율변동을 완화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데 합의했다. 비판도 있었던 ‘환율 주권’에 대한 우리의 구상이 G20에서 채택된 것이다. 이런 합의는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평가할 만하다.”
한국은 G20 정상회의 초기부터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것도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이었던 덕분이다. G20 정상들은 1차 워싱턴회의에서 주요 합의에 대한 각국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조율하는 임무를 2009년 전후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단 3개국(트로이카)에 위임했다. 3개국은 브라질, 영국, 한국이었다. G20 정상회의를 처음 시작한 만큼 회의에 대한 준비와 의제 설정을 기존의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단에 맡긴 것이다.
keyword G20
세계 경제질서를 논의하는 주요국 모임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요 7개국(G7)이 중심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 전통적 선진국이다. G7 정상들은 1976년 2차 오일쇼크 이후 매년 정례회담을 갖고, 세계적 현안을 협의했다. 1998년부터는 러시아도 G7 회의에 초청해 G8으로 커졌다. 냉전이 붕괴되고 핵무기 관리가 불안해지자 G7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
2005년엔 G8 정상회의에 중국 브라질 인도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이 초대돼 G13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신흥국을 대거 참여시키면서 G20이 탄생했다. G20엔 G8에 더해 아시아에서는 한국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호주 등 5개국,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 3개국, 유럽에서는 터키 EU의장국, 아프리카ㆍ중동에서는 남아공 사우디아라비아 등 2개국이 포함됐다. G20은 인구에서 전 세계 3분의 2, 국내총생산(GDP)은 85%를 차지한다.특별취재팀 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 mbnomics@hankyung.com
◆이 시리즈는 매주 화·목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