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의 벼랑 끝 노인들…1000만원 대출까지 받기도
입력
수정
용돈 벌이하러 왔다가 집 잃고 이혼, 대부업체에 손까지 뻗어
경마장 입장자 줄었지만 노인들은 매일 입장하는 사람이 대부분 “심심풀이로 왔다가 집 잃고 이혼하는 사람이 태반이야.”
23일 오전 11시 과천의 경마공원. 정문부터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일명 ‘말대가리’의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건물 안 모니터 앞엔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노인들로 북적거린다.
건물 2층에서 만난 한 70대 노인은 1999년 직물공장에서 외환위기 여파로 일을 그만두게 된 이후로 1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마장에 출입한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경비도 알아봤는데,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그런 자리도 다 차지하고,,, 집에 계속 있으면 자식들도 불편해 하는 것 같아 몇 백 원 들고 오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계속 오게 됐지.” 경마장에서 만난 4명의 노인들 모두 게임의 승률이 낮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술값, 용돈 마련 등의 명목으로 매일 나오고 있다고 했다.
1~2 만 원의 소액으로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마장에 첫 발을 내딛었던 노인들의 '도박'이 위험 수위로 치닫고 있다.
바깥 어른이 경마장을 좋아해 서울 가리봉동 집에서 과천까지 10년째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다는 70대 여성은 “하루는 할아버지가 나둔 마권뭉치를 보고 어떤 젊은 사람이 돈 빌릴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 면서 "하루에 1000만 원씩 돈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경마장 내 청소 담당자는 “불황 여파로 경마장을 찾는 사람이 과거보다 줄었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직업이 없기 때문에 평일에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종자돈을 갖고 경마장을 찾는 여성 노인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더 큰 금액에 베팅하기 위해 4~5명이 한 조가 되어 돈을 마련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건물 내 신문지를 펴고 2~3명 정도의 할머니들이 자리에 둘러 앉아 마권 수십장과 경마 잡지를 가운데 두고 의논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청소 담당자는 또 “대부분 노인들이 점심, 저녁을 먹지 않은 채 게임에 열중 한다”면서 "오후 시간이 되면 돈을 잃으면서 예민해진 노인들이 사소한 일로 욕설을 내뱉고 싸움까지 벌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마사회 측 직원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연신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노인들은 경마장에서 쉽게 대출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경제난에 빠진 노인들은 개인이나 가정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경마장을 빠져나오면서 노인들의 건전한 여가 생활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경닷컴 뉴스팀 open@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