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화폐의 타락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
마침내 환율전쟁이 시작된 것 같다. 브라질 재무장관은 미국의 3차 양적완화가 신형 보호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외환시장 개입과 금융거래세 인상 등을 통해 헤알화를 방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환율전쟁 선포다. 일본도 노골적으로 엔고 저지에 나서고 있다. 엔·달러 환율을 높이려고 달러를 사들여 미 국채에 넣고 있다. 외신은 지난 7월 말 현재 일본의 미국 국채보유액이 1조1171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며 연말에 가면 보유규모에서 중국을 제치고 다시 1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 인도 같은 나라들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나라마다 “나부터 살고 보자”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 유럽 일본이 모두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한정으로 돈을 풀겠다고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미 중앙은행(Fed)과 유럽중앙은행(ECB)은 제로금리 연장, 무제한 국채매입 같은 극단적인 조치로 유동성을 살포하고 있다. 경제가 언제 회복될 지 모르니 달러와 유로화 가치의 동반 추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나라들마다 자국 통화 방어에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일단 나부터 살고보자는 식이다. 신흥국가는 물론 선진국들까지 무역장벽을 높이며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위기를 돈을 풀어 해결하겠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재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 국채를 산다. 국채와 화폐의 교환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가부채는 급증하고 돈은 더 많이 풀려 화폐가치는 추락하게 된다. 이른바 화폐의 타락이다. 정부가 만사를 해결하려 들수록, 큰 정부가 될수록, 통화량은 늘고 화폐가치는 더 떨어진다. 정치의 타락이 화폐의 타락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대책이 해법이 될 수 없다. 80년대 초반 유례없는 인플레를 잡았던 폴 볼커 전 Fed 의장은 얼마 전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양적완화는 경제위기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케네디부터 닉슨 카터 레이건, 그리고 오바마까지 5명의 대통령 밑에서 경제관료를 지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볼커다. 지금같은 유동성 대량 살포가 훗날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란 것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정치가 경제를 망친다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인 미국에서 공화당이 금본위제 부활론까지 제기하는 것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한국 정치권은 미래를 걱정하는 이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환율전쟁이니 무역전쟁이니 하며 총성이 울려도 남의 일이다. 오로지 눈앞의 셈법에 빠져 쪼개고 뺏고 나눠주겠다는 구호를 외친다.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에다, 일단 쓰고 보자는 포퓰리즘 복지타령, 하우스푸어 워킹푸어 소호푸어를 모두 단번에 해결해주겠다는 힐링 선동이 판친다. 일자리 창출이 최우선이라면서 그룹을 해체하고, 기업의 사업영역을 뺏고 신규사업 진출을 막아 투자할 곳을 없애려고 든다. 골목상가 장사가 안되는 것도,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도 그저 모두 대기업 탓이고 소득격차는 부자들 책임으로 돌린다. 앞뒤가 바뀌고 모순 투성이인 구호들이다.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정치가 문제다. 올해는 수십개 나라가 정권 교체기를 맞았던 정치의 해였다.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프랑스는 올랑도 대통령을 뽑은 지 불과 5개월도 안돼 사르코지를 선택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여론이 높다고 한다. 그래도 이제라도 깨달았다는 프랑스가 부럽다. 우리는 12월 대선이 끝나도 이대로라면 반추할 만한 것도 없다. 재앙이다.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