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시대 왕비들은 태교·여가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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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
심재우 외 지음 / 돌베게 / 340쪽 / 2만5000원
자유 연애가 허락되지 않은 전통시대에 남녀가 인연을 맺는 방법은 중매였다. 왕실 혼례는 중매쟁이가 다리를 놓는 게 아니라 공개 구혼하는 방식을 취했다. 왕의 배필이 될 만한 규수를 구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뒤 후보 신청을 받아 적격자를 뽑았다. 태종 때부터 시작됐다는 이 간택(揀擇)은 공개 구혼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특채였다.
심재우 교수 등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자 7명이 펴낸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는 조선시대의 왕비 간택 절차와 과정, 왕비의 궁궐 생활, 왕비를 둘러싼 친인척과 정치 세력에 이르기까지 왕비의 일상적 삶과 역사적 자취를 깊숙이 들여다본 책이다. 왕비 간택은 왕이 즉위한 뒤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세자빈으로 간택 후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함께 왕비가 됐다. 간택은 초, 재, 삼간택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다. 후보는 30여명에서 시작해 5~7명으로 압축되며 최종 세 명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한다.
간택 절차는 금혼령이 떨어지면서 시작되는데 금혼 대상은 보통 15~20세 처녀들이었다. 간택에서 탈락한 처녀에게는 허혼령을 내려 혼인을 허락했다. 간택 대상에 오른 처녀는 궁녀처럼 왕의 여자가 돼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한다.
왕비는 왕의 정실부인이자 국모로 떠받들어졌지만 정작 부모들은 왕을 사위로 맞아들이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각 가정에서는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는 등 갖은 수단을 써 처녀단자를 제출하지 않으려 했다. 인조 때는 딸을 숨기려다 발각된 전현직 관료들을 잡아다가 추문하기도 했다. 왕비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후계자 생산이었는데 자손을 많이 낳지는 못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적장자(嫡長子)로 왕위에 오른 이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상당수의 왕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으며 왕실의 직계손이 끊겨 방계에서 왕이 나오는 일도 있었다.
왕비는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기회는 적었지만 외척을 동원하거나 수렴청정 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했으며,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나고 나서도 남동생 윤원형과 함께 정사에 관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책은 태교, 자녀 교육법 등 왕실의 출산 문화,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 여성들의 독서와 여가생활, 정치 권력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의 가문 및 외척, 후궁·궁녀 등 궁중 여성들과 왕비의 관계 등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