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월가 슈퍼리치들의 유행어…'크루그먼 스타일'

8월 이후 글로벌 증시 '정책 장세'
대부분 크루그먼 교수 주장 채택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외국인과 얘기할 때도 ‘강남스타일’이 단골 메뉴로 빠지지 않다 보니 한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까지 느끼게 된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요즘 월가의 슈퍼리치들 사이에선 ‘돈을 벌려면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읽으라’는 말이 돌고 있다. 한마디로 ‘크루그먼 스타일’이 유행이다.

올 8월 이후 글로벌 증시는 전형적인 ‘정책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중심국일수록 과도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에 시달리고 있어 이에 대한 처리 방향은 증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4년 전 미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직면하자 위기 해결의 정책 기조를 ‘긴축’과 ‘부양’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재정정책에서 ‘로고프 독트린’과 ‘크루그먼 독트린’ 간 논쟁은 유명하다. 긴축정책을 강조한 로고프 독트린은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신용등급 추락과 같은 신뢰 위기에 봉착하고 △재정지출을 통한 부양대책은 ‘구축효과(crowding out effect)’로 경기가 의도했던 대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란 근거에서 나왔다.

하지만 금융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재정적자 축소에 우선순위를 두면 1930년대 대공황 당시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빠질 수 있다는 반론이 거셌다. 거꾸로 재정지출을 통해 경기를 부양시키면 누진적 조세구조를 갖고 있는 국가일수록 재정수입이 늘어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크루그먼 독트린’이다.

이 독트린 논쟁은 ‘세계 최고 경제학과’란 명성을 놓고 하버드대(케네스 로고프 교수)와 프린스턴대(폴 크루그먼 교수) 간에 벌어진 자존심 싸움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결국 오바마 정부가 손을 들어준 쪽은 크루그먼 독트린이다. 오바마 정부는 출범 이후 금융위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재정정책의 우선순위를 경기 부양에 두는 일관된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크루그먼 독트린은 유럽 재정위기 해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2년 반 전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하자 그리스 포르투갈 등 위기 발생국에 대해 ‘긴축을 강요해야 한다’는 주장과 ‘자체적인 위기 해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각을 세웠다.

유럽 경제의 최후 보루인 독일은 이와 관련, 긴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이른바 ‘베를린 컨센서스’를 주창했다. 논리는 간단하다. 유럽 위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경기 부양보다 긴축을 추진해야 위기 발생국의 도덕적 해이를 막으며 균열된 유럽의 통합을 재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베를린 컨센서스’가 많이 누그러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를린 컨센서스도 위기 발생국의 경기 부양을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는 겉으로나마 유럽 위기가 안정을 찾는 직접적 배경이 됐다. 유럽 위기 해결에서도 ‘크루그먼 독트린’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통화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다. 경기와 금융시장이 모호해서 그렇다지만 중앙은행의 목표와 통화정책 관할범위, 기준금리 결정 방식 등 그 어느 때보다 논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크루그먼 교수와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간에 벌어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타기팅(inflation targeting)’ 논쟁이다.

인플레이션 타기팅이란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목표인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정한 억제선, 엄격히 따진다면 상한선을 말한다. 이 선이 높아지면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보다 위기 극복이나 경기 회복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금융위기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높아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현재 2%인 인플레이션 타기팅 상한선을 3~4%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또는 기대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져 실질소득(혹은 기대실질소득)이 감소하면 경제주체들은 이를 보전하기 위해 소비와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논리다. 버냉키 의장은 이런 주장에 대해 ‘무모하다’고 반박했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한번 자극받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자산의 실질가치가 떨어지면 경제주체들은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과 달리 ‘디레버리지(deleverage·부채 축소)’에 치중해 경기가 더 침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플레이션 타기팅 논쟁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면 미국 국민들이 기억하기 싫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을 들 수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인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해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물가만 올라갈 경우 이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물가 안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버냉키 의장이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는 배경인 셈이다.

당초 3차 양적완화 정책이 어려울 것으로 봤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버냉키 의장은 이 정책을 발표했다. 그것도 물가가 안정된 것을 최우선 배경으로 꼽았다.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에 다가간 것이다. 정책장세 시장에서 중요한 정책일수록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대로 모두 결론났다. 월가의 슈퍼리치들 사이에 ‘크루그먼 스타일’이 급속히 확산되는 이유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