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주유소들도 외면하는 혼합판매

윤정현 산업부 기자 hit@hankyung.com
“가격이나 카드 혜택도 중요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폴사인(간판)을 단 채로 ‘섞어 판다’고 공개했을 때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거죠. 기름은 안전과 직결된 문제고, 그만큼 신뢰가 먼저니까요.”

주유소의 혼합판매가 허용된 지 한 달 째를 맞고 있다. 그러나 혼합판매 안내문을 내걸고 여러 정유사의 기름을 섞어서 파는 주유소는 아직 한 곳도 없다.혼합판매란 정유사의 폴사인을 단 주유소가 해당 정유사 제품 외에 타사나 수입 석유제품을 혼합해 판매할 수 있는 제도다. 8월 지식경제부가 내놓은 석유제품 복수상표 자율판매(혼합판매) 시행방안에 따르면 혼합판매를 해도 정유사별로 구분 저장할 필요는 없다. 기존 저장탱크에서 섞어 팔 수 있고, 주유기 구분도 필요 없어 추가 비용이 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주유소들은 혼합판매에 동참하지 않는 것일까.

이 같은 의문은 한 주유소 사업자의 얘기를 듣고 풀렸다. 그는 전량구매계약을 맺지 않을 경우 줄어드는 신용카드 혜택이나 정유사의 시설지원은 2차적인 문제라고 했다. 당장 ‘소비자의 인식’이 가장 겁난다는 것이다. 구분 저장을 할 필요는 없지만 혼합판매 사실을 알리는 표시를 주유소 내에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이면 아예 무폴 주유소로 전환하는 게 낫다”며 “폴사인을 달고 영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혼합판매는 알뜰주유소, 석유제품 전자상거래와 함께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기름값 대책의 3대축 중 하나다. 혼합판매 허용으로 주유소들이 낮은 공급가를 제시하는 정유사의 물량을 구매하게 해 정유사들 간의 가격경쟁을 촉발하겠다는 게 정책 취지다. 그러나 한 정유사 관계자는 “혼합판매를 통해 획기적인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주유소들이 변화를 시도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정유사들 간의 공급가격 차이가 ℓ당 100원도 나지 않는데 어떻게 혼합판매로 100원을 낮출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이런 가운데 지식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주유소의 석유 혼합판매 현장점검을 계획하고 있다. 정유사들의 전량구매계약 강요 행위 여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시장의 불공정을 점검하기에 앞서 제도의 실효성에 문제가 없는지 먼저 따져볼 일이다.

윤정현 산업부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