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닥치고 경제민주화'의 불편한 진실

선거용 '보수색 지우기'로 출발
사유권 억압하는 국가개입 모순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
민주주의 사회,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사고(思考)의 쓰나미’이다. 지금의 ‘경제민주화’가 바로 그렇다. “왜 경제민주화여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닥치고 경제민주화’가 돼 버린 것이다. 용어가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다 보니 경제민주화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다. 바벨탑이 따로 없다.

경제민주화가 등장하게 된 과정을 복기(復棋)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2011년에 시행된 ‘무상급식’ 투표다. 특정인이 아닌 특정대안을 선택하는 ‘정책선거’에서 더욱이 향후 복지정책의 방향타가 될 중요한 투표에서 가치집단이어야 할 한나라당이 중립을 지킨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주사위는 그렇게 던져졌고 이어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한나라당은 위기를 맞았다. 한나라당 비대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대위의 첫 작업은 ‘보수의 색깔’을 빼는 것이었다. 실패요인을 ‘보수성’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시도한 적이 없는, 들어서지 않은 길”로서의 보수의 흔적을 지우려 노력한 한나라당이었다. 경제민주화도 그 일환이다.여야 간에 경제민주화가 ‘공유’되면서 경제민주화는 거칠 것 없는 질풍노도가 됐다. 이로써 이념과 노선에 기초한 ‘나침반 경쟁’은 사라지고, 주어진 방향으로의 ‘속도경쟁’만 남게 됐다. 하지만 이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속도경쟁은 속성상 과잉으로 치닫게 돼 있다.

선언적 성격을 띠던 경제민주화는 총선을 거치면서 ‘사후적으로’ 논리의 옷을 입었다.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문제를 경제민주화로 슬기롭게 풀지 않으면 지속적 발전을 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경제민주화 주장이 대두된 2011년 직전인 2010년까지의 경제상황을 살펴보면,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10대 재벌의 매출 비중으로 표시한 경제력집중, 대·중소기업 영업이익률 차이, 그리고 ‘지니계수, 5분위배율, 상대적 빈곤율 및 중산층 비율’ 등 소득분배 지표에서 별다른 개악의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 대부분 지표는 오히려 2010년에 개선됐다. 객관적 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2011년에 경제민주화가 홀연히 전면에 부각될 이유는 없다.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는 점입가경이다. 여야 간에 경제민주화가 공유되다 보니 ‘쇼핑카트’에는 공존할 수 없는 수많은 정책공약(30여개)이 담겨 있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여야 합의를 통해 최소 2개 이상의 경제민주화 법안을 국회에서 공동으로 통과시키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낫다고 봐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등에 업은 재벌에 대한 압박수위도 도를 넘어섰다. ‘순환출자 해소, 금산분리 강화, 계열분리 명령제’ 등은 사실상 재벌해체를 겨냥한 것이다. 이들 정책이 현실화되면 외국 투기자본의 배만 불리게 된다. 매물로 나온 알짜 기업과 지분을 살 수 있는 자본력을 가진 곳은 외국 회사나 해외 투기자본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내 기업과 지분을 인수해 기술격차를 좁히려 할 것이다. 또한 금산분리 강화로 금융계열사를 떼어내면 주가는 폭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재벌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시스템 리스크’를 감안해 계열분리 명령제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것은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시스템 리스크’는 금융회사의 연쇄도산으로 금융시스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만큼의 심각한 위협을 의미한다.

우리가 관행과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이상적 질서를 창출하기에는 인간의 인지능력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시장 질서를 이성에 의한 인위적 질서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 자유와 재산권에 제약을 가하는 국가개입주의를 ‘민주화’로 명명하는 것만큼 ‘불편한 진실’은 없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민주화다. 권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주체 간의 ‘경제관계의 민주화’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