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넘어야 할 산 많은 사채관리회사

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
“공공기관이 맡으면 아무래도 좀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한국예탁결제원이 사채관리 업무를 시작한 데 대해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쳤던 사채관리 업무가 까다로워지는 것 아니냐”며 이렇게 말했다. 예탁결제원을 사채관리회사로 지정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답했다.예탁결제원은 지난달 말 본격적으로 사채관리 업무를 시작했다. 지난 10일에는 한국서부발전과 첫 사채관리계약도 맺었다. 그러나 앞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일단 기업들의 반발이 심하다. 사채관리회사제도는 지난 4월 상법 개정과 함께 실질적인 투자자 보호를 위해 도입됐다. 도입 이후 각 증권회사의 투자은행(IB) 부서가 돌아가면서 맡아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증권사가 업무를 맡다 보니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예탁결제원은 다르다. 기업과 이해관계가 적다. 공공기관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업무를 시작하면 기업의 신용도 감시부터 사채권자 집회 소집·운영까지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기업으로선 예탁결제원을 사채관리회사로 지정하면 자신들을 꼼꼼하게 관리해 달라고 수수료를 주는 셈이 된다.

턱없이 부족한 수수료도 문제다. 국내 사채관리 업무 수수료는 대개 100만~300만원이다. 이 수준이라면 과연 예탁결제원이 언제까지 적극적으로 사채관리 업무를 할 수 있을지, 다른 증권 유관기관이 참여할지 의문이다. 해외에서는 철저한 사채관리 업무가 이뤄지는 만큼 수수료도 많다. 일본과 미국은 회사채 발행금액의 0.02~0.03%를 매년 사채관리 수수료로 받는다.미흡한 제도도 해결 과제다. 사채관리회사는 도입됐지만, 물적·인적 요건 등에 대한 규제가 아직 없다. 대부분 증권사가 별도 부서나 전문인력을 두지 않고 종전 방식대로 사채관리업무를 하고 있다.

작년 한 해만 4500억여원의 채권에서 부도가 발생했다. 약 70종목의 채권에서 부도가 발생했는데도 사채권자 집회가 열린 적은 거의 없다. 개인투자자의 회사채 투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주식이나 펀드에 비해 회사채 투자자 보호는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기업과 투자자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입된 사채관리 업무가 자리잡으려면 기업의 인식 변화, 제도 정비, 현실적인 수수료 체계 도입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