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82학번이 82학번에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저도 82학번입니다. 올해로 대학 입학 30주년입니다. 홈커밍데이 행사들이 한창입니다. 30년 만에 상봉한 친구들은 정지용의 시구처럼 ‘함부로 쏜 화살’ 같습니다. 주름도, 뱃살도, 흰머리도, 사는 모습도, 생각도.

82학번은 대개 1963년생입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이자 386세대의 실질적인 맏형입니다. 정년을 걱정하면서 세상 변혁의 꿈도 채 못 버렸습니다. 초등 3학년 때 유신을, 고1 때 10·26을 겪었고 국민교육헌장은 지금도 외울 정도입니다. 초중고 모두 콩나물 시루였고 대학도 졸정제 탓에 부대끼며 다녔습니다. ‘똥파리’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입니다.왜 갑자기 82학번이냐고요? 어느덧 우리 사회의 중심에 다가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 뉴스 인물 중 유독 82학번이 도드라집니다. 나경원 원희룡 조국 등 서울대 법대 82학번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조 주사파 김영환과 진보당 사태의 몸통 이석기도 있습니다. 장하준 김난도 진중권은 두루 유명인사가 됐죠. 박근혜 캠프의 이혜훈 강석훈, 안철수 캠프의 홍종호도 그렇습니다.

58년 개띠 이후 가장 주목

정계 관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모두 발에 채이는 게 82학번입니다. 대중문화와 스포츠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찬욱 정보석 최민식 강산에 박해미 고(故)김광석과 류중일 전창진 유재학 등이 동년배입니다. 58년 개띠 이후 가장 눈에 띄는 집단입니다. 언젠가 82학번에서 대통령도, 노벨상도 나오리라 기대합니다. 헛된 꿈일까요?82학번이 주목받는 것은 일단 선배들보다 ‘쪽수’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해 오십이니 각 분야에서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보다는 저항의식이 유달랐던 데 있다고 봅니다. 전두환이라는 절대악에 맞서 싸운 기억(또는 부채의식)이 워낙 강렬했던 탓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절대악이 사라진 지금도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절대악을 상정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식이란 18세까지 몸에 익힌 편견의 컬렉션”이라고 정의했지만, 82학번의 상식이 된 저항의식은 스무살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정치권 82학번들이 경제민주화를 주도하는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몸은 교정을 떠난 지 오래인데 의식은 여전히 신림동 녹두집, 안암동 마마집을 맴도는 것은 아닐까요.

트라우마로는 미래 못 이끌어트라우마로 세상을 본다면 82학번식 오류가 생겨날 뿐입니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도 버스기사가 운전은 훨씬 잘하는데 이민 제한 덕에 스웨덴 버스기사가 50배를 더 번다고 비난했습니다. 만약 스웨덴에 가서 인도에서처럼 곡예운전을 했다간 당장 해고될 것입니다. 시장원리와 생산성, 노동규율, 서비스 수준처럼 눈에 안 보이는 것을 간과한 오류입니다.

이제 서울의 푸른 가을하늘에 최루가스는 사라졌습니다.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오바마의 조크가 유쾌하게 들립니다. 유엔 사무총장과 세계은행 총재를 동시에 배출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아이폰에 맞짱 뜨는 유일한 스마트폰이 삼성 갤럭시입니다. 이런 것들도 인정해야 미래가 보이지 않을까요?

학창시절 부모님들과 부딪치며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답답해 하는지도 모릅니다. 노래방에 가서도 신곡 대신 운동가만 고집하는 꼰대로…. 평생 권위주의를 혐오하다 스스로 권위주의에 빠지진 맙시다.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지만, 하늘은 고사하고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정치판에 휩쓸려 가지나 마시길….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