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투자 유도하려 과세한다는 궤변

"기업 사내유보금에 과세 움직임
유보율과 투자는 별개 깨달아야
규제 풀고 정책불확실성 해소를"

이병기 < 한국경제연구원·선임연구위원 >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로 세계 여러 나라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고 한국의 기업들도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대기업이 그동안 쌓아 놓은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윤을 많이 내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만 일부 정치권에서는 최근 기업의 현금보유가 과다하고 대기업들이 곳간에 현금만 잔뜩 쌓아 놓고 투자는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급기야는 국정감사를 통해 사내유보가 많은 기업에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조만간 입법화를 추진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우선 현금보유 수준의 과다 여부를 판단하는 지표로서 사내유보율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사내유보율은 자본금 대비 잉여금으로서 이 중 이익잉여금의 일부는 현금성 자산으로 투자돼 있고 나머지는 유·무형 자산이나 재고자산 등에 투자돼 있는 것이다. 사내유보율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기업 내에 현금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자의 계산에 따르면 2001~2005년 기간에 30대 그룹의 유보율은 298.7%에서 2006~2010년 기간에 578.3%로 증가했다. 기업의 유보율이 늘어난 것은 단지 기업 수익성이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에 불과하며, 기업이 신규로 소요되는 투자자금의 상당부분을 증자 등 외부시장을 통해 조달하지 않고 내부유보를 통해서 조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기업이 내부유보 자금을 현금 형태로 보유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의 비율이 높은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30대 기업집단의 현금보유 비율은 2001~2005년 기간에 9.1%였으나 2006~2010년 기간에 9.7%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현금성 자산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는 것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 같은 우리나라 기업집단의 현금보유 비율은 최근 미국이나 아시아 주요국의 평균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보율과 투자 측면도 따져봐야 한다. 사내유보 비판론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유보율이 높아지면서 기업투자는 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30대 기업집단의 투자는 2001~2005년 기간에 8.8%였고 2006~2010년 기간에 8.9%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반면, 전체 기업의 투자율은 상대적으로 훨씬 낮았다. 이것은 대기업들이 급격하게 현금보유를 늘렸지만 투자증가율은 낮았다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으며 또 유보율과 투자는 별도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높은 사내유보금을 억제하기 위해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세계적으로도 단지 투자촉진 목적으로만 사내유보금에 과세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의 사내유보가 과다한 수준이라는 주장의 배경에는 적절한 사내유보 수준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기업별로 어떤 값이 적절한 사내유보 수준인가를 판단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기업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사내유보금에 대해 과세제도를 도입하는 경우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단기적으로는 부동산투자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또 장기적으로는 기업투자를 감소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기업은 투자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하면 사내유보는 물론 차입을 통해서라도 과감하게 투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의 관점에서는 투자를 통해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좋은 투자환경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기업이 과감하게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정책 불확실성을 낮추고 막힌 부분을 뚫고 각종 장벽으로 쌓여 있는 규제나 진입을 방해하는 장애요인들을 걷어내야 한다. 투자촉진을 위해 현금사용을 늘리라는 신호를 기업에 보내려면 사내유보금에 대한 포괄적인 과세보다는 특정 투자행위에 대해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등 조세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투자확대를 위해 보다 더 바람직한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병기 < 한국경제연구원·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