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의 이슈 프리즘] 'B급'들의 유쾌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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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올해 한국 프로야구의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왕으로 각각 선정된 박병호와 서건창은 ‘B급 성공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박병호는 2005년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1군보다는 2군에 머문 시간이 더 많은 무명신세였다. 작년 여름 넥센으로 옮기고 나서야 제대로 된 주전 생활을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 홈런, 타점, 장타율 1위를 휩쓸며 MVP를 꿰찼다.
2008년 프로생활을 시작한 서건창은 이듬해 방출되는 수모를 당했고, 별볼 일 없는 기량으로 인해 일반 병사로 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작년 겨울 정규 멤버가 아닌 연습생 신분의 ‘신고 선수’로 프로무대에 다시 선 그는 천신만고의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안정된 수비와 도루 2위 등의 고른 성적을 인정받으며 ‘중고 신인’의 서러움을 단박에 날렸다. 확대되는 ‘스펙 해방구’
감독 데뷔 첫해에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 기록을 세운 류중일 삼성 감독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선수 시절 유격수로 탄탄한 수비와 야무진 공격을 펼치기는 했어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이처럼 ‘인생 역전’과 반전(反轉)의 짜릿한 스토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야말로, 프로야구가 올해 관중 700만명을 넘어서며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는 대표적 요인으로 꼽힌다.
각본 없이 펼쳐지는 ‘반전’의 드라마는 ‘왕년에…’로 시작하는 이른바 ‘스펙’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B급 스펙’의 핸디캡을 치열한 자기계발로 날려버리는 ‘인생 역전’의 무대가 스포츠를 넘어 우리 사회 곳곳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학과성적 일변도로 신입생을 선발하던 대학들의 입시 전형이 다양해진 데 이어 기업들의 신입 사원 선발도 학력과 학벌을 뛰어넘는 ‘열린 채용’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지난주 발표한 올해 하반기 신입사원 합격자 4500명 가운데 36%인 1600명은 지방대학 출신이었다. 예년의 비율(25~27%)을 훨씬 넘어섰다. 디자인직 신입사원 채용에는 학력을 따지거나 필기시험을 따로 보지 않고, 제출한 디자인 작품만으로 합격자를 가리는 ‘창의 전형’을 적용한 것도 주목되는 변화다.
시장 성패 관건은 ‘자기규율’
‘A급’으로 분류되는 기업일수록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임원들의 학벌이 다양하다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임원들 가운데 이른바 SKY를 비롯한 명문대 출신 비율이 가장 적은 기업이 삼성과 현대자동차인 반면,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은 몇몇 기업이 실적과 평판도 등 모든 면에서 ‘B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그게 ‘시장’의 힘이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전략과 현장에서 통할 수 있는 실천역량일 뿐, ‘스펙’이 아니다. ‘광적인 규율(fanatic discipline)’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면밀한 상황 판단을 전제로 한 ‘실증적 창의성(empirical creativity)’으로 무장한 인재와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게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정상급 기업들을 분석한 경영사상가 짐 콜린스의 결론이다.
‘B급 스펙’으로 인해 방황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시장이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처럼 분명하다.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는 ‘남탓’으로 젊은 영혼을 오도(誤導)하는 정치판이 아니라, 시장이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