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장기불황에 한국형 '벌처' 웃는다

헐값에 사들인 채권 적극 회수
유암코·우리에프앤아이 '고수익'
메리츠종금 등 사업 참여 모색
▷마켓인사이트 11월11일 오후 3시32분


불황의 늪이 깊어질수록 성장 속도가 빨라지는 회사들이 있다. 원리금 회수가 불투명한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적극 회수하는 부실채권(Non-Performing Loan) 관리회사가 대표적이다.국내 NPL 시장 선두업체인 연합자산관리(유암코)와 우리에프앤아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2000년 대우사태, 2003년 카드사태 이후 얼어붙었던 NPL 시장이 급성장한 덕분이다.

썩은 고기를 먹는 대머리 독수리의 습성에 비유해 ‘벌처(Vulture)펀드’라고 불리는 해외 펀드도 대부분 철수, 위협적인 경쟁자도 사라졌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2009년 한시조직으로 설립된 유암코는 지난달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사업 기간을 2019년까지 5년 더 연장키로 했다. 장기적인 사업계획 수립이 가능해지면서 오는 13일에는 설립 후 최초로 만기 5년짜리 장기 회사채도 발행키로 했다.○이익 ‘곱절’ 신용등급 ‘상향’

NPL 관리회사들은 최근 불황 장기화에 따른 자산 및 수익 증가, 신용등급 개선 효과를 누리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이 실적악화로 고전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2000년대 초·중반 왕성하게 활동했던 해외 벌처펀드 운용사인 허드슨어드바이저스코리아(론스타 계열), 에이지스코리아(도이치뱅크 계열) 등이 철수한 상황에서 시장 성장에 따른 수혜가 집중된 덕분이다.국내 대형은행 6곳이 공동출자로 설립한 유암코는 올 상반기에 반기 기준 사상 최대인 62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설립 이듬해였던 2010년 연간 영업이익 187억원의 3배를 웃돈다. 총자산도 올 상반기 말 3조9855억원으로 같은 기간 2배로 급증했다. 이성규 유암코 사장은 “당초 사업계획 대비 NPL 인수물량이 늘어난 덕분에 올해 목표로 했던 당기순이익 860억원을 초과 달성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간 내부 수익률은 세전 16%, 세후 12%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은행 자회사인 우리에프앤아이는 올 상반기에 작년 한 해 영업이익의 60%(265억원)를 벌어들였다. 또한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단기신용등급(A1)은 두 계단 오르고 장기등급(A+)도 ‘긍정적’ 전망을 부여받았다.

NPL 관리회사들은 헐값에 채권을 사들인 뒤 적극적으로 회수에 나서 이익을 낸다. 경기가 부진하면 회수율은 떨어지지만 싸게 매물을 많이 사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유암코 관계자는 “건설업과 조선업의 구조조정, 아파트 가격 하락과 경기침체에 따른 가계부실 증가로 NPL 잔액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바젤III(은행 자본 건전화 방안)와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도 은행들의 부실채권 매각을 촉진하고 있어 사업 전망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NPL 평균 매입가격은 대출채권 원금 대비 약 60%, 향후 5년간 예상 회수율은 매입가격 대비 110%로 추정했다.

○사업확장 자신감 커져

유암코는 오는 13일 설립 후 처음으로 3000억원 규모의 장기회사채(3, 5년 두 종류 만기)를 발행할 예정이다. 안정적인 시장 성장 덕분에 자금 스케줄을 더 길게, 대규모로 짤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발행한 회사채 만기는 대부분 1년6개월이었다.

원래는 5년 동안만 영업할 계획으로 설립됐으나 2014년 기업상장(IPO)을 추진, 상시 기업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처음 설립할 때만 해도 장기적인 영업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만큼 NPL시장 상황이 좋아졌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유암코의 성장은 경쟁사들의 NPL 시장 진입도 부추기고 있다. 메리츠종금, 미래에셋, 동부증권과 일부 저축은행들이 새롭게 참여해 사업기회 확대를 모색 중이다.

한편 국내 은행들의 NPL 보유 규모는 올 들어 다시 증가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0년 24조8000억원에 달했던 은행 보유 NPL은 2011년 18조8000억원으로 줄었다가 올 상반기 말 20조8000억원으로 늘어났다. 유암코 관계자는 “일부 산업의 실적악화가 지속돼 앞으로도 은행들의 관련 부실채권 비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며 “회사의 수익 성장세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태호/좌동욱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