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에 맛들인 벤처…90%가 정책자금 의존

KDI '제2의 벤처 붐을 맞고 있는가' 보고서

"벤처기업 급증하지만 '제2의 붐' 보기 어려워
테마에 휘둘려 무조건 집행…옥석 가려야"
#1. 3D(3차원) 기술 기업을 표방한 A사는 2010년 영화 ‘아바타’가 대성공을 거둔 직후 만들어졌다. 정부가 3D 관련 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팀을 급조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정부기관 서너 곳으로부터 수억원에 달하는 투자자금을 받았을 뿐 별다른 성과물은 내지 못한 채 간판만 유지하고 있다.

#2. 벤처투자회사 출신의 컨설턴트 B씨는 지난해 한 정부기관의 벤처기업 지원 대상자 선정에 참여했다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연예계 진출을 위해 자작 뮤직비디오 1편을 만든 게 경력의 전부인 대학생에게 3000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B씨는 “연예인이 되려고 자작 비디오를 찍은 사람에게 정부 돈을 지원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벤처기업 수가 급증하고 있지만 이처럼 정부의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기업이 대부분이어서 ‘제2의 벤처 붐’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시장의 힘으로 벤처 생태계가 활성화한 게 아니라 정부의 정책 지원 대상이 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김기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12일 ‘제2의 벤처 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정부 자금을 받는 벤처기업 급증이 정부의 벤처지원 제도를 남용한 결과는 아닌지, 또 벤처지원 제도가 기업 성장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벤처 지위를 유지하도록 유인한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장 비율 더 낮아져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10년 말 국내 벤처기업 수는 2만4645개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벤처기업 수는 2001년 1만1392개까지 늘었다가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2003년 7702개로 줄었다. 이후 다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 2010년 2만개를 돌파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들 중 90.6%인 2만2231개가 기술보증기금 등의 지원을 받는 ‘정부 지원 벤처’라고 분석했다.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냉정한 평가를 통해 투자한 회사는 622개(2.5%)에 불과했다. 연구·개발(R&D)이 중심인 연구·개발 기업 비중도 6.4%에 그쳤다.

김 연구위원은 벤처 수는 갈수록 늘지만 코스닥 상장 벤처기업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5년 전체 9732개 벤처기업 중 405개(4.2%)가 코스닥에 상장돼 있었지만 2010년에는 2만4645개 벤처기업 중 1.2%에 불과한 295개만 상장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지원 업체는 상장 비율이 더 낮았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설립된 2만5698개 벤처 중 정부 지원을 받은 업체는 2만539개. 이 중 1.8%인 385개만 상장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받은 벤처는 1566개 중 5.5%인 86개가 상장했다. 김 연구위원은 “정부 지원보다 시장에 의한 선별이 기업 성장에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라며 “최근엔 벤처 수만 늘어날 뿐 시장에서 평가받아 성장하는 경우는 줄었다”고 꼬집었다.

◆정부 지원 받은 뒤 매출 감소

김 연구위원은 정부가 지원하는 기업의 규모(매출 기준)가 2005년 매출 25억원대에서 2010년 10억원대로 추락하는 등 계속 축소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 지원을 받은 뒤 매출이 줄거나 정체하는 회사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정부의 자금이 점점 더 영세한 기업에만 몰리고 성장과 무관하다는 것은 정책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시사한다.이 같은 지적은 벤처업계에서 일찌감치 논란이 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전문성에 의한 경쟁력 평가를 기반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테마를 정해 놓고 무조건 집행하기 때문에 옥석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일환 퀄컴벤처스 한국대표는 “한국은 정부가 테마를 정해 놓고 투자자금을 배분하면 거기에 맞춰 벤처들이 태어나는 전형적인 정부 주도형 벤처 생태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벤처 생태계는 정부가 만든 가짜 생태계라는 비판도 나온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은 “특정 테마를 정해 놓고 50개 벤처를 지원하라는 지침이 내려지면 회사의 사업 내용, 전망, 기술력 등을 무시한 채 무작정 숫자만 맞추는 게 지금 한국의 벤처지원 제도”라며 “이렇게 정부가 억지로 만든, 경쟁력 없는 가짜 벤처 생태계에 돈을 넣는 것은 세금 낭비”라고 비판했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