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세상물정 모르는 '헛똑똑이'

김병일 지식사회부 차장 kbi@hankyung.com
“슬라브와 슬레이트를 구분 못하는 판사가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는 “20대의 미혼인 가정법원 판사나 변호사들은 이혼소송이 들어오면 무조건 ‘이혼하라’고 부추기던 시절이 있었다”는 등 웃지 못할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법조계 하면 법률과 상식으로 똘똘 뭉친 엘리트 집단을 떠올리기 쉽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한다.최근 대법관들까지도 ‘횡성한우’ 판결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대법원은 다른 지역 소를 횡성으로 가져와 1~2개월 풀을 먹인 뒤 도축했더라도 ‘가짜 횡성한우’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기간을 기준으로 무자르듯 일률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사료의 종류와 제공방법, 소의 체중 변동 여부 등 구체적 상황을 좀 더 심리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자 횡성지역 축산농가가 들고 있어났고, 2심 판사는 “법의 형식적인 의미에만 집착해 본질에 맞지 않는 이상한 결론을 냈다”고 반발했다.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작년 5월 ‘12개월 이상’ 사육한 곳이라야 원산지로 표시할 수 있다고 관련법이 개정된 점만 봐도 대법원의 판결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 이익”

시도 때도 없이 수사 주도권을 놓고 경찰과 씨름하는 검찰 역시 일반의 기대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들 식구인 김모 부장검사의 거액 금품수수 의혹을 수사하면서도 자성하기는커녕 검사를 ‘의사’에, 경찰을 ‘간호사’에 빗대며 키재기나 하는 모습에서 경찰수사를 지휘할 만한 자격은 찾기 힘들다. 대검 중수부 폐지나 상설특검·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공약이 나오는 이유가 이런 꼴불견 때문인지 왜 모르는 것일까.“사건의 진상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신을 제외하곤 피고인 본인이다. 그 다음은 검사 변호사 순이고, 마지막이 판사다. 그런데 사건의 결론은 판사가 내린다.” 법조계의 유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업무상 배임과 경영판단’ 이슈를 들여다보면 비슷한 공식이 적용된다. ‘경영판단’ 원칙이란 경영진이 사심없이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조치였다면 설사 기업에 손해를 끼치는 결과가 초래됐더라도 죄를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경영상 판단이었는지, 회사에 손해를 끼칠 의사가 있었는지(업무상 배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기업의 경영진이다. 미국에선 기업가의 창의성을 위축시키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경영판단 문제에 판사들이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도 “업무상 배임죄는 법규정이 모호해 보는 시각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경계선상에 있는 사례가 많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런 솔직한 법조인은 드물다. 마치 줄자 하나만 있으면 웬만한 인테리어는 견적이 척척 나오는 건축사처럼 법조문이라는 잣대에 맞춰 구형하고 판결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1999년 사법연수원(28기)을 수석으로 수료했지만 판·검사의 길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동철 변호사가 미국 로펌 폴헤이스팅스 소속으로 외국법 자문사 자격을 얻어 이달부터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로스쿨 출신들도 사법연수원 출신의 선배들에게 뒤지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당시 품었을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회복하지 않으면 지금의 존재감마저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김병일 지식사회부 차장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