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깐깐한 피아니스트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활화산’ ‘피아노의 여제’ 등으로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불꽃 같은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지만 변덕스런 성격 탓에 ‘악명’도 높다. 몸 상태가 나쁘거나 준비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밥 먹듯 연주를 취소한다. 20세기 후반 클래식음악계를 이끌었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약속을 세 번이나 어겼을 정도다. 1980년 쇼팽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됐을 때 이보 포코렐리치가 본선에서 탈락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 직접 연주회를 주선해 그를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독주는 너무 외롭다”며 실내악과 협연만 고집하고 있다.

유명 콩쿠르 출신이 아니면서도 최고의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른 예프게니 키신은 못 말리는 연습벌레다. 세계 각국에서 숱한 연주회를 갖지만 연습시간을 빼앗길까봐 ‘관광’을 하지 않아 공항부터 호텔까지의 길만 기억한단다. 지난해 11월 내한공연 때도 ‘하루 일곱 시간씩 연습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비슷한 시기에 내한했던 베를린필조차 키신의 연습일정을 듣고 리허설 시간을 조절했다. 그는 ‘앙코르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앙코르를 적게는 7곡, 많게는 16곡까지 들려준다. 지독한 연습의 결과를 무대에서 남김없이 쏟아내는 것이다.안드라스 쉬프는 공연장 피아노 대수와 상태를 꼼꼼하게 점검하는 건 물론 전속 조율사까지 대동한다. 2005년 런던 공연에서는 두 대의 피아노를 쓰기도 했다. 어려운 테크닉이 많고 손가락을 빨리 움직여야 하는 곡은 스타인웨이로, 좀 묵직한 울림을 내야 하는 곡은 뵈젠도르퍼를 사용했다.

오는 17·19일 예술의전당에서 내한공연을 갖는 라두 루푸도 까다롭기 짝이 없다. 피아노 종류와 공연장 냉난방, 의자까지 세심하게 체크한다. 이번엔 스타인웨이의 그랜드피아노 중에서도 일련번호 여섯 자리 가운데 첫 세 자리가 578번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건반의 무게는 저음에서도 53g 이내여야 하고 조율사가 언제든 건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장비를 갖고 다닐 것도 명시했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연주 때는 촬영이나 인터뷰, 인터넷 중계도 안되고 공연장 천장에 붙어 있는 녹음용 마이크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당일 공연장 안에 들어온 관객만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건반 위의 은둔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루푸는 2010년 한국을 찾을 예정이었지만 일본 공연 도중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일정을 모두 취소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까탈스러울 정도로 세심하게 준비하는 루푸가 첫 내한공연에서 어떤 선율을 들려줄지 궁금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