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길주 KIST 원장 "100억, 1000억 버는 엔지니어 나와야 이공계 부활"

한경과 맛있는 만남

획기적 과학발전으로 국민소득 2만달러 넘었지만 성공한 롤 모델 없어 아쉬워
노벨상 수상보다 더 필요

외교관 부친따라 캐나다 유학…1991년 귀국해 환경분야 연구
베트남에 한국형 KIST 설립 지원…이제 개도국 돕기에 나서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1966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는 그해 미국의 원조 920만달러를 받아 설립됐다. 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종합연구소가 국내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KIST 설립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다음해 최초의 과학전담부처인 과학기술처를 만들며 기술 개발에 힘쏟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최근 KIST는 베트남 하노이에 KIST를 롤모델로 한 과학기술연구원(베트남과학기술연구원·V-KIST)를 설립해주는 계약을 체결했다. 원조를 받아 출발한 연구소가 그간 쌓은 노하우를 해외에 다시 전수하는 국제 과학기술계의 새로운 공적개발원조(ODA) 모델을 만든 것.우리나라 대표 출연연구기관의 수장인 문길주 KIST 원장(62)을 서울 재동 한식점 ‘호반’에서 만났다. 호반은 헌법재판소 맞은편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고 주차장도 없는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초저녁부터 손님으로 꽉 들어차 있을 만큼 단골이 많은 맛집이다.

호반의 대표 음식은 병어찜과 순대. 저녁 식사와 술 안주를 겸하기 위해 대표 음식에 낚지볶음까지 추가 주문하니 음식들로 상이 가득찼다.

○국내 1세대 환경학자문 원장은 최근 베트남과의 지원 협약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이번 베트남 지원협약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라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KIST가 그 노하우를 후발국에 전수하는 것은 ODA의 가장 이상적인 선순환 사례”라고 말문을 뗐다. 문 원장은 이어 “베트남은 전쟁의 아픈 경험을 겪었고 이를 악착스러운 근성으로 이겨내는 등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며 “한국이 아시아 맹주가 되기 위해선 외국인재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 원장은 주제가 너무 딱딱하게 시작됐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병어찜을 집어올리며 주제를 음식점과 본인의 이력 쪽으로 돌렸다.

“1993년 친구(전준수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의 소개로 이곳을 처음 찾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까지 모두 이 집의 단골이었어요. 점심에는 5000원짜리 순두부가 있는데 요즘 이런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착한 식당을 찾는 것도 쉽지 않죠.”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대표 환경학자다. 캐나다 오타와대 기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원에서 기계·환경학 석·박사를 마치는 등 한국인 가운데 환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1세대 과학자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 출신들이 설립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지역의 항공 및 환경 연구소 ‘에어로바이론먼트(AeroVironment)’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1991년 KIST로 돌아와서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스모그 현상’의 문제점을 알리며 국내 환경 연구를 주도했다. 국제대기보전세계연합회 부회장, 한국대기환경학회장을 역임했고 2006년 KIST 부원장을 거쳐 2010년 11월 원장에 취임했다. 현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정책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이공계

문 원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이지만 학생 때까지만 해도 문과에 더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이공계와의 인연은 고2 때인 1970년 캐나다 주재 공사로 부임한 부친 문희철 씨(89)을 따라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부친은 캐나다 오타와 총영사와 쿠웨이트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다.문 원장은 당시 급작스럽게 현지 학교에 들어갔지만 말조차 통하지 않은 상태여서 문과를 선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영어로 공부하려니 그나마 수학이 쉽더라고요. 그래서 공과대학에 간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문 원장은 대학에서 자동차 디젤엔진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고 학위 취득 후에는 에어로바이론먼트에서 환경 연구를 담당했다. 기억에 남는 연구를 묻자 그랜드캐니언 과제를 꼽았다. 당시 미국에선 나호야 밸리에 있는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연기가 그랜드캐니언에 영향을 미치자 논란이 빚어졌고 문 원장이 책임을 맡아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협곡에서 1000m가량 내려가야 하는 인디안가든부터 바닥 콜로라도 리버까지 수개월간 오르락내리락하며 대기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며 “그랜드캐니언을 지키려는 미국 내 관심이 늘어나면서 연구결과 발표 후 발전소 후처리 공정을 대폭 변경하는 등 대히트를 쳤다”고 소개했다.

문 원장이 국내에 돌아온 건 1991년. 당시 환경연구소를 만든 KIST는 해외 석학이 필요했고 문 원장 영입에 나섰다. 당시 KIST의 연봉은 2000만원 수준. 미국에서 받던 5만달러 연봉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는 한국 과학 연구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백만장자 기술자 나와야 이공계 부활

호반의 또 다른 별미는 생굴이다. 주인이 충남 서산에서 직접 재료를 공수해온 덕분에 갯바위에 붙은 굴에서 캔 알이 작고 부드러운 자연산 굴을 맛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굴을 좋아했다는 문 원장은 접시에 덜어 간장에 비비더니 한 사발을 금방 비웠다.

안주가 푸짐해지면서 술잔이 몇 잔 돌자 과학계의 오랜 난제인 이공계 부활로 화제를 바꿨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이공계 안 가는 게 큰 문제인데 박찬호, 싸이 같은 성공한 부자 롤모델이 나오지 않은 것이 가장 아쉽다”며 “100달러도 안 되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기까지 과학기술이 큰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 맞는 성공 모델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과학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더 발전해야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자 목소리를 더 높였다. “노벨상? 확언하는데 노벨상은 조만간 사라질 겁니다. 갈수록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돈 얘기하면 속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서 성공은 아무래도 돈입니다. 100억원, 1000억원씩 버는 부자 기술자가 나와야 젊은 인재들을 이공계로 모을 수 있습니다.”

문 원장은 대기업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백만장자 기술자를 배출하는 건 나라가 돈을 풀어서 만들 수는 없고 기업이 엔지니어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며 “최근 한 대기업을 상대로 직무발명 보상 소송을 내 60억원 배상 판결을 받은 사례를 보면서 마음 속으로 박수쳤다”고 덧붙였다.

"출연연구소 통합 필요…젊은이들 자신감 가져라"

KIST는 설립 이후 우리나라 산업 발전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다른 전문 연구소들이 많이 생겨 나면서 역할 중복이라는 문제점에 노출돼 있다.

문 원장은 고령화, 도시화 등과 관련된 의료, 환경, 에너지 등을 KIST가 앞으로 주력할 연구 분야로 꼽았다. KIST는 최근 일반 연구 분야 외에 뇌과학, 의공학, 녹색도시기술 등 전문연구소를 설치해 미래 사회 융합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뇌과학연구소에서는 뇌인지구조를 규명해 알츠하이머와 같은 고령화 질병에 대해 연구하고, 의공학연구소에서는 ‘건강한 100세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난치병 치료, 재활로봇 등을 개발하고 있다. 녹색도시기술연구소에서는 도시화·집적화로 발생하는 다양한 환경, 에너지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과학기술 전담부처 신설 반대

문 원장은 주요리를 어느 정도 먹고 술도 몇 차례 돌자 식사로 순대국과 소면을 주문했다. 호반 순대국은 기름기가 많고 순대 특유의 냄새가 많이 나는 함경도식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술이 좀 들어간 뒤 먹는 안주로는 제격이었다. 문 원장의 주량은 소주 3~4잔 정도. 그는 인터뷰 후반에 건배엔 참여했지만 술을 더 먹지는 않았다.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과학계에서는 과학기술 전담 부처 설립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 원장은 이에 대해 “과학은 이제 모든 경제 관련 부처의 현안이 될 만큼 일반화했다”며 “특정 전담 부처를 만드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대신 연구과제 중복을 피하고 융합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 출연연구소를 통합하는 데는 찬성 의견을 밝혔다.

“개별 연구소들이 각자 살려다보니 이 과제 저 과제 할 수밖에 없고 여기서 중복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이번 정부에서는 토론만 하다 끝났는데 새 정부에서는 이를 보다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지요.”

2시간가량의 인터뷰가 끝나 가려고 하자 그는 과학계 원로로서 취업난 등으로 고생하는 젊은 사람에 대한 충고도 내놓았다. 긍정적 생각과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아무 기반 없이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했고 말 못하는 애들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등 두 번이나 이민해 본 사람”이라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4000만원씩 연봉을 주는데도 조선소가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가지 않는데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나면 자신감도 생기고 새로운 생각과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길주 원장의 단골집 호반…얼큰한 병어찜·순대에 서산강굴 별미

호반은 합리적 가격에 일품요리를 먹을 수 있는 한정식 집으로 유명하다. 1961년 무교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가 재개발 사업으로 조계사 부근으로, 2002년엔 다시 지금의 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표 메뉴는 병어찜과 순대다. 병어찜은 병어 중에서도 맛 좋기로 소문난 참병어만을 사용한다. 냉동이 아닌 생물을 고집한다. 얼큰한 양념과 푸짐함 때문에 큰 인기다.

순대는 선지를 사용하는 보통의 검은 순대가 아니라 직접 만들어 속을 만두처럼 꽉 채운 게 특징. 순대와 순대국 모두 독특한 모양과 맛 덕분에 이를 찾는 단골 손님이 많다. 일반 식당에서 흔히 접하기 쉽지 않은 서산강굴도 별미다. 충남 서산에서 주인이 직접 가져오는데 추석 이후부터 이듬해 4월까지만 내놓는다. 채소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본 재료의 맛을 살린 담백하고 푸짐한 낚지볶음도 인기다.순대는 2만5000원(대), 순대국 7000원, 낚지볶음 3만5000원(대), 병어찜 4만원(대), 서산강굴은 3만3000원.
(02)733-4886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