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냉장않고 장시간 보관해도 신선도 유지시킨 '유통혁명'

Best Practice - '무균 종이팩의 혁명' 테트라팩

금속용기·유리병에 담던 우유…종이팩으로 진공살균 포장
병따개 없이 간편하게 개봉…포장비·전기료 등 비용 절감
전세계 170개국에 진출…2010년 매출 약 12조원
재활용 통해 환경론자 반발 무마…와인 등 주류포장에도 적용

“우유를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포장하는 방법은 없을까?” 1943년 어느 날. 루벤 라우싱은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라우싱은 몇 년 동안 우유 포장 및 유통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우유를 장시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밀봉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좀처럼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긴 튜브로 우유를 계속 흐르게 채운 다음, 튜브를 끊어냄과 동시에 뜨거운 클램프(쇠집개)로 밀봉하면 어때?” 우유를 끊기지 않게 채우면 불순물의 원인이 되는 기포가 생기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라우싱은 갸우뚱했다. “뜨거운 클램프로 밀봉하면 우유에서 불에 탄 맛이 날 것 같아.” 아내는 반문했다. “해보긴 했어?” 라우싱은 곧장 실험실로 달려가 아내의 말대로 해봤다.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우유는 깔끔하게 밀봉됐다. 탄 맛도 없었다. 낙농업 유통혁명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라우싱은 스웨덴의 무균 종이팩 포장법 발명가다. 그는 이 용기 이름을 사면체(tetrahedron) 모양을 본떠 ‘테트라팩(tetrapak)’이라고 지었다.

○낙농업 유통혁명, “깡통따개를 버려라”

라우싱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 유학시절 식료품 유통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초 슈퍼마켓이 등장하는 등 현대적인 식료품 유통체인이 태동되던 때다. 유학을 마치고 스웨덴으로 돌아와 오켈룬트 & 라우싱이란 회사를 설립, 밀가루 우유 등의 포장법 개발에 매달렸다. 당시 우유는 금속용기나 유리병에 담겨 팔렸다. 제품들은 유통기한이 짧았다. 멀리 배달하기 위해선 복잡한 냉각시스템이 필요했다. 우유에서 깡통 냄새가 나기도 했다. 또 소형으로 포장된 우유를 마실 때도 병 따개나 캔 따개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테트라팩은 이런 불편 사항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테트라팩으로 포장하면 우유와 같이 쉽게 상하는 제품을 냉장보관하지 않고도 최대 1년까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다. 공장에서 식료품점까지 운반하고 보관하기 위한 냉각시스템도 필요없어진다. 그만큼 에너지, 전기료 등 다양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테트라팩은 또 깡통이나 병과 달리 개봉하기 위해 별도의 도구가 필요없다. 종이팩의 한 곳을 찢은 다음 바로 마실 수 있다. 냄새 걱정도 없앴다.

테트라팩과 진공살균 포장기술 개발에 성공한 라우싱은 1951년 오켈룬트 & 라우싱의 자회사로 포장재업체 테트라팩컴퍼니를 세웠다. 1952년 9월 첫 번째 포장설비를 스웨덴의 룬트낙농협회에 납품했다. 이후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1964년 유럽 이외 지역엔 처음으로 중동 레바논에 발을 들였다. 1972년엔 아프리카의 케냐, 1978년엔 남미의 브라질, 1979년엔 중국에 각각 진출했다. 현재 테트라팩은 세계 170개국에서 포장설비를 가동하고 있다. 2010년 한 해 매출은 89억5000만유로(약 12조원)에 달했다. 연간 포장용기 생산량은 1450억개에 이른다.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각각 20개씩 나눠줄 수 있는 양이다.

○수요 창출의 비밀, “고객을 찾아내 교육하라”미국인들이 유럽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면 작은 문화충격을 겪는다. 특히 식사 후 커피를 마실 때 그렇다. 미국인 친구는 냉장고에서 커피에 넣을 우유를 찾는다. 이를 본 유럽인 친구는 “우유는 찬장에 있어”라고 말한다. 찬장을 열면 네모난 우유 팩이 놓여 있다. 그 옆에 오렌지주스, 요구르트, 푸딩 팩 등이 줄줄이 놓여있다. 미국인들은 실온에서 보관하지 않는 음식들이다. 유럽인들이 얼마나 테트라팩에 익숙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하지만 테트라팩은 문화적 환경이 다른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 미국 가정의 99%가 냉장고를 보유했다. 당시 유럽에선 이 비율이 72%에 그쳤다. 냉장고 보급이 빨랐던 미국에선 테트라팩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미국인들은 상하기 쉬운 음식을 실온으로 보관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테트라팩은 미국 시장 공략법을 찾기로 했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기업 고객이다. 이미 냉장고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과 레스토랑 체인을 설득하기는 수월했다. 유통과 보관 과정에 들어가는 냉장시스템과 에너지 비용 등이 필요 없어 즉각적인 비용절감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미국 가정과 레스토랑 등에서 테트라팩으로 포장, 유통된 유제품과 소스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자신이 레스토랑에서 먹고 있는 치킨 위에 뿌려진 소스가 테트라팩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소리 없이 미국 시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중국에 진출할 땐 우유 보급 운동부터 벌였다. 1990년대까지도 중국에는 우유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요부터 창출하기로 한 것이다. 테트라팩은 부모와 교사 등을 상대로 우유가 학생들의 영양 공급에 얼마나 좋은지 교육했다. 중국에서 생산, 가공되는 원유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낙농업자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2009년엔 상하이 인근 푸둥에 기술센터를 열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중국 식료품 유통산업의 경영과 마케팅 엔지니어링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뿐만 아니라 낙농제품의 지역수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도로의 상태를 분석하기도 한다. 수요 창출에 방해가 되는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의 공격

테트라팩은 1990년대에 환경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테트라팩은 에너지 절감 등의 측면에서 환경친화적이다. 문제는 무균팩을 재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미국 메인주는 환경 보호를 이유로 무균팩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테트라팩은 경쟁회사들에 협력을 구해 위기를 넘겼다. 공동으로 ‘무균포장업협회’를 설립, 환경과학자 등과 함께 재활용 프로그램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이 협회는 재활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메인주는 1991년 무균팩 금지법을 없앴다. 1996년 테트라팩은 백악관에 초대돼 지속 가능한 성장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테트라팩은 현재 유제품뿐 아니라 소스 등 각종 식품과 와인 등 주류 포장에까지 활용된다. 와인을 테트라팩에 담아 팔고 있는 미국 와인수입업체 J 소이프의 매튜 캐인 최고경영자(CEO)는 “병 와인을 운송할 때 운송 중량의 절반을 포장재가 차지하는 반면 테트라팩 와인은 와인 93%, 포장재 7%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