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올해의 책] 침체 속 빛난 다섯 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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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전반적인 침체였다.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스크린셀러만이 반짝 인기를 끌었을 뿐 순문학 신작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빛난 작품 5편이 꼽혔다. 김연수의 여덟 번째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시인 이병률의 여행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김애란의 《비행운》, 최민석의 《능력자》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에 절망하면서도, 그 사이를 건너 뛰어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그려낸 작품이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살아가는 근거라는 것. 생후 6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된 작가 카밀라가 생모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와 24년 전 과거를 추적한다. 그 안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인물들의 갖가지 기억 속에서 카밀라는 기어코 ‘진실’과 마주한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이병률 시인이 20년간 가슴속에 쌓아온 여행의 감상과 에피소드를 담은 책. 그에게 여행은 “시간을 살 수 있는 모험”이다. 세상의 경계에서 역사적 시차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는 얘기다. 손금의 생명선이 유난히 길어 보이기에 오래 살겠다고 했더니 “너, 의사구나!” 하며 아픈 딸아이를 봐달라던 케냐의 가게 주인,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라면과 콩을 나눠주니 빈 라면봉지에 흙을 담아 콩을 기르던 인도의 가족 등 가슴 뭉클한 여행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태연한 인생》은 은희경이 2년 만에 내놓은 장편. 매혹과 균형, 사랑과 고독, 낭만과 냉소, 패턴과 파격 등 얼핏 이분법으로 보이는 대립들이 작품 속에서 경계 없이 섞이며 흘러가는 인생을 보여준다.
소설의 시작은 신비로운 여주인공 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는 어느 봄날이다. 류의 아버지는 한 여인을 만나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고 함께 유학을 떠나지만 곧 싫증을 내고 만다. 류의 어머니는 상실감을 딛고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며 ‘균형의 세계’를 유지한다. 류는 이런 부모의 이야기를 통과하며 자란 여인. 그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요셉과 사랑에 빠지지만 상실이 오기 전에 그를 떠남으로써 고독을 택한다. 김애란의 신작 《비행운》에는 등단 10년차를 맞은 작가의 성숙하고 확장된 세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제목 ‘비행운’은 비행기가 지나갈 때 남기는 구름인 동시에 ‘행운이 아닌’이라는 뜻도 된다. 작가는 “20대에 쓴 작품들이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동시에 책임을 지는 정서도 생긴 것 같다”며 이번 작품을 설명했다.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루의 축’에는 공항에서 청소 일을 하는 50대 중년 여성이 나온다. 모두가 떠나는 국제공항에서 일하지만 사실 그의 삶은 ‘국제’나 ‘세계’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떠나지 못하는,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삶은 위태롭게 떠다닐 뿐이다. 남편의 실족사와 아들의 의도치 않은 범죄.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가족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서히 무너져간다. 그는 공항 이용객이 두고 간 처음보는 음식 ‘마카롱’을 씹으며 담담히 되뇌인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최민석의 장편 《능력자》는 일단 재미있다. 10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위해 2000만원이 필요했던 가난한 소설가 남루한은 결국 아버지의 소개로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전 WBA복싱세계챔피언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남루한은 공평수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남루한은 점점 공평수가 가진 삶에 대한 진정성에 빠져든다. 계속해서 나오는 농담을 따라 작가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다보면 결국 ‘삶의 진지함’을 만나게 된다. 통장잔고 3320원인 시절을 이겨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