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레 미제라블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단테가 시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로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자신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설명한 말이다. 1862년 첫 출간돼 20년간 500만부나 팔려 프랑스에선 성경보다 더 많이 읽힌 소설이 됐다. 시인 테오필 고티에는 “한 사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시대상황과 자연이 창조해낸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레 미제라블은 우리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집필 당시 제목은 ‘레 미제레(Les Miseres, 비참함)’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 군상들을 세세히 그려낸 대서사시다. 선과 악, 생과 사, 죄와 벌의 경계도 모호하다. 영국의 디킨스,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일맥상통한다.

시대 배경은 1789년 대혁명부터 1830년대까지 공화정, 제정, 왕정이 숨가쁘게 이어지던 시기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샤를 10세가 왕이 된다. 그러나 왕정 복귀에 반발해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고 루이 필립이 왕으로 옹립된다. 소설 속 바리케이드 싸움은 1832년 6월 일어난 공화파의 무장봉기였다. 루이 필립은 ‘시민왕’ ‘바리케이드왕’으로 불린 마지막 왕이다.

흥미로운 점은 장발장의 양녀 코제트의 연인이자 과격 혁명주의자인 마리우스다. 그의 조부는 왕당파, 부친은 황제파로 그려진다. 이는 작가 위고가 걸어온 사상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위고의 부친은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까지 지낸 반면 어머니는 왕당파여서 어릴 적 영향을 많이 줬다고 한다. 역사적, 정치적, 사상적 함의를 가진 ‘레 미제라블’에 대해 비평가 랑송은 “하나의 세계이자 하나의 혼돈”이라고 평했다. 노도와 같은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은 휩쓸려갔지만 인간애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상이 작품을 관통한다. ‘레 미제라블’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으로’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레 미제라블’ 열풍이 뜨겁다. 뮤지컬의 우리말 공연에 이어 뮤지컬을 영화화한 ‘레 미제라블’이 개봉 엿새 만에 100만명 돌파가 확실시된다고 한다. 뮤지컬은 1985년 런던 초연 이래 27년째 최장기 공연기록을 경신 중이다. 영화 속에서 장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가 뮤지컬 초연 당시 장발장 역을 맡았던 배우일 만큼 연륜이 쌓였다. 김연아의 이번 시즌 주제도 레 미제라블이다.

민음사 더클래식 펭귄 등 출판사들은 앞다퉈 5권짜리 완역본을 출간했다. 분량이 2500쪽 안팎에 달하는 데도 수만질이 팔린다고 한다. 무엇보다 원작의 힘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140자가 난무하는 세상에 고전의 묵직한 울림이 더없이 반갑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