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매료시킨 포크송 여왕…밥 딜런과 자유로운 세상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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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34) 조안 바에즈2011년 10월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자 서구 언론들은 엉뚱하게도 한 여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쳤다. 바로 미국 포크 뮤직의 개척자이자 저항운동의 대명사인 조안 바에즈였다. 언론은 저마다 잡스가 바에즈와 한때 사랑을 나눴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잡스는 생전에 바에즈와의 관계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앨런 도이치맨이 쓴 잡스 전기(2001)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간략하게 언급된 적도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바에즈 역시 잡스와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도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인 것이었다. 잡스는 포크 록으로 팝음악의 새로운 장을 연 밥 딜런의 열렬한 숭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딜런의 음악은 물론 그의 사생활까지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딜런이 한때 바에즈와 예사롭지 않은 관계였다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두 사람이 오래 전에 헤어졌으니 잡스로선 한번쯤 바에즈와의 연애를 꿈꿀 만했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바에즈로 말하면 퀘이커 교도이자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인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지만 철철 흘러넘치는 음악적 끼를 어쩌지 못해 결국은 대학을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보스턴 일대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남다른 미모에 고음의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하는 청아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독특해서 처음 듣는 순간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그는 포크 가수인 봅 깁슨의 눈에 띄어 1959년 그와 함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에 서게 된다. 언론은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맨발의 마돈나가 나타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혼이 깃든 미국 전통 음악, 흑인 영가에 매료된 그는 포크 뮤직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그 보급에 앞장선다. ‘도나 도나’ ‘메리 해밀턴’ 등 주옥 같은 노래들은 순식간에 대중의 폐부에 파고들었고 그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포크의 여왕으로 입지를 다진다. 당시 딜런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있던 바에즈는 딜런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딜런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창법으로 대중을 향해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다. 노래를 통한 사회 개혁이라는 대의에 공감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연인이자 정신적 동지가 됐고 1965년까지 함께 무대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복음을 전파했다.그러나 현실참여 운동 과정에서 심한 정신적 부담감을 느낀 딜런은 이후 궤도를 이탈, 로큰롤 컨트리 로커빌리(록음악과 컨트리를 결합한 음악)로 나아가는 한편 낯간지러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의 파국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딜런은 떠났지만 바에즈는 꿋꿋이 노동운동, 반전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저항운동의 등불로 자리한다. 그가 1963년에 발표한 ‘우리는 극복할 거예요(We Shall Overcome)’는 마치 국가처럼 울려 퍼졌다. 바에즈가 남편이 될 데이비드 해리스를 만난 것도 반전운동의 현장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지만 5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바에즈는 해리스와의 삶을 통해 자신은 혼자 살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바에즈가 잡스와 만난 것은 41세 때였다. 14세 연하의 잡스는 이미 엄청난 거부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바에즈에 따르면 둘은 그리 부드러운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만나면 서로 어깃장을 놓기 일쑤였다. 한번은 잡스가 컴퓨터로 사상 최고의 실내악 5중주곡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자 바에즈는 그런 음악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을리 없다고 맞받아쳤다. 잡스는 대꾸도 못한 채 끙끙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젊은 천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선 그와 결혼하면 돈 걱정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테크놀로지가 영혼의 고갈을 초래했다고 보는 그가 기계 속에도 영혼을 서리게 할 수 있다고 본 잡스를 받아들이기는 벅찬 일이었으리라.
잡스의 추도식이 있던 날 바에즈는 흑인 영가인 ‘스윙 로, 스위트 체리옷’을 불러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자유의 세상을 꿈꾸는 흑인노예들의 염원을 담은 이 노래는 짧지만 사랑했던 이의 영전에 바치는 지극히 바에즈다운 노래였다. 모든 이들이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본 바에즈는 만인이 정보기술(IT)의 편의성을 공유토록 함으로써 자유롭게 소통하는 세상을 열고자 했던 잡스와 묘한 연대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사랑을 두고 서구 언론이 떤 호들갑이 그리 밉지만은 않아 보인다. 잡스를 통해 바에즈의 진가를 새삼 확인하게 됐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