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what-정경호의 벼랑 끝 소통이야기] 이순신의 소통리더십-낮추며 이룬다

[So what-정경호의 벼랑 끝 소통이야기] 10편. 소통리더십을 실천한 역사적 멘토 : 이순신의 소통리더십-낮추며 이룬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소통리더십의 대표적 인물은 세종 대왕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순신 장군이 소통리더십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는다. 이순신 장군은 모든 군사를 소통에 참여시켜 일방적인 군대식 지휘 체계에서 벗어나 혼연일체와 화합의 군대로 만든 소통리더십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하급 졸병(卒兵)이라도 병법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말하게 하였던 이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과 부하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투를 연구하였는데,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병사가 군대에 관련된 일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으므로 전투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솔선수범과 공정함의 소통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듬해, 1593년 50여 일에 걸친 웅천포 해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통선 1척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순신 장군은 아래와 같은 장계를 올려 죄를 청한다. 사실상 부하 장수들이 이순신 장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방심하여 발생한 일이었지만, 장군은 이에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자 한 것이다. 제가 중책을 지고 티끌만한 공로나마 나라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통선(統船) 1척을 전복시켜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신이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기에,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선일척경복후대죄장(1593.4.6)- 앞의 이야기가 솔선수범의 전형이라면 공정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평소 이순신 장군은 해전 상황을 보고할 때 여러 장수들의 노력과 공을 상세히 기록하여 모두가 공적에 걸맞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나아가 천대받던 기술자들의 공도 높이 평가하고 배려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1593년 8월에는 새로운 무기인 정철총통의 제작을 보고하면서 무기 제작에 참여한 대장장이와 종들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은 것이다. 창의적 소통 창의력은 21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온 많은 리더가 뛰어난 창의력의 소유자였는데 16세기 이순신 장군은 창의적 소통의 뛰어난 리더였다. 제작한 여러 무기와 작은 아이디어 하나도 모두가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적 소통을 통해 발견한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거북선으로, 사실 거북선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3년 태종 때이지만, 180년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태어난 거북선은 구조나 성능이 한결 발전한 것이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힘쓴 나대용 장군은 28세 때 병과로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 수사로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찾아가 자신이 연구한 거북선 설계도를 보이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할 방법에 대한 의견도 보고했다. 이순신 장군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가까이 두고 거북선 건조를 비롯한 모든 전투 장비를 준비하는 일과 작전 추진에 참여시켰다. 그는 거북선 건조에 온 힘을 기울이는 한편, 이순신과 함께 옥포, 당포, 사천 등 15여 회 해전에서 왜적과 왜선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함인 창선(?船)을 만들어 건조하였고,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海?船)을 발명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장군의 놀라운 창의적 소통이 없었다면 거북선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창의적 소통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놀라운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창의적 소통으로 끊임없이 부하들과 노력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내 세계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문서적 소통 문서 혹은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해 줄 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올바른 역사 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약 7년간 전쟁 중에 직접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난중일기》와 임진왜란 해전 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는 류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고전으로 알려졌다. 난중일기에는 일본과의 전쟁을 치르며 쓴 일기답게 군영 생활 여러 해전의 군사전략과 해전 상황, 당시 조선 사회의 생생한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군 본인의 감정과 생각이 담백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사상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되고 있다. 인간적 소통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 걸고 지켰다. 하지만 무관으로서 장군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 직언하는 장군을 못마땅하게 여긴 상관들의 모함으로 여러 번의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억울한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역경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충성과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간적 소통이 돋보이는 이순신 장군의 면모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부딪힌 백성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무찌를 때에도 왜선 한두 척을 남겨두었는데, 이는 왜적들이 도망갈 곳이 없고 막다른 상황이 되면 우리 백성에게 해코지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이 도륙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견내량파왜병장(1592.7.17.)- 이순신 장군은 어떠한 정치적, 환경적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인간적 소통의 최고의 리더다운 삶을 보여주었다. 한국경제TV 핫뉴스 ㆍ"北 김정은 성형수술 사실" 中 언론 ㆍ조니 뎁, 23세 연하 엠버 허드에 `차였다` ㆍ암스트롱 "7번 우승 모두 약물 복용" ㆍ강유미 기습키스, 방송도중 박충수에…"연기 맞아?" ㆍ정소영, 노출 비키니 과감한 포즈 `섹시` ⓒ 한국경제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