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베르디와 바그너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19세기는 서양사에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음악도 황금시대를 구가했으며 그 중심에 오페라가 있었다. 오페라 전성기를 이끌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이탈리아의 주세페 베르디(1813~1901)와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다. 두 사람은 묘하게도 동갑내기다. 베르디는 5월생이고 바그너는 10월생이다. 이들은 생전에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만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서로 피했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말도 아꼈다. 단지 베르디는 바그너를 겨냥해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헤매고 있다”며 그의 작품을 에둘러 비판했다. 바그너도 “아무 대사를 하지 않는 게 가장 낫다”며 대사 위주의 베르디 작품을 은근히 비꼬았다. 하지만 베르디는 바그너가 먼저 사망하자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악가가 죽었다고 비통해했다고 한다.이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꽃피웠다. 바그너는 20세에 극장장을 지냈을 정도다. 하지만 먼저 유명세를 탄 것은 베르디다. 그는 40세 이전에 이미 30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이 모두 이때 만든 작품이다. 바그너도 30대에 오페라 작곡을 했지만 40대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역작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26년 동안 공을 들여 61세에 완성한 작품이다.

베르디와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완연히 차이가 난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전통 오페라를 계승해 성악 위주의 가극(歌劇)을 많이 작곡했다. 반면 바그너는 관현악 중심의 악극(樂劇)을 창시했다. 베르디를 가극왕으로, 바그너를 악극왕으로 부르는 이유다. 바그너가 악극을 작곡한 것은 독일의 강한 악센트가 오페라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들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베르디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데 비해 바그너는 마니아들이 많다. 하지만 오페라를 통해 자국민들에 강한 자긍심과 민족 정신을 일깨우게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그너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나치의 선전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이스라엘에선 바그너 음악 연주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올해 세계 음악계는 이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연다. 아시아에선 주로 베르디를 기념하는 행사가, 유럽에선 바그너 관련 행사가 많이 열린다는 점이 재미있다. 한국에서도 국립오페라단, 서울시향 등 베르디를 무대에 올리는 곳이 많은 데 비해 바그너 연주는 상대적으로 적다. 새로운 음악문법으로 시대를 장악한 바그너의 열정을 느껴볼 기회도 좀 늘었으면 한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