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론 수학 방정식으로 정리…케인스 거시경제학 체계화

민경국 교수와 함께하는 경제사상사 여행 (24) '수리경제학의 창시자' 폴 새뮤얼슨

절약의 역설 주장한 케인스 혁명에 매료
승수효과 등 이론 다듬어…"정부 실패란 불가능" 주장도
수식으로 경제이론 정리…과학주의라는 비판도 받아

현대 거시경제학의 아버지요, 수리경제학의 창시자인 폴 새뮤얼슨(P. A. Samuelson)은 폴란드 출신 유대인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경제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었다. 경제학이 직업적 학문으로 번창하던 시기에 그 같은 역사적 사건은 여러 위대한 학자들을 경제학 분야로 유인하고 새로운 해답을 요구하는 많은 이슈를 제공했다.

새뮤얼슨은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명쾌한 설명과 처방을 제시했다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케인스 혁명’에 매료됐다. 그에게 케인스는 우상이었다. 허술하고 불분명한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을 매끄럽게 다듬고 체계화하면 실업과 성장의 효과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새뮤얼슨은 소비성향, 절약의 모순, 유효수요, 승수효과, 재정·통화정책 등 케인스 경제학의 개념과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가 각별히 주목한 것은 ‘구성의 모순’이라고 부르는 절약의 모순이다. 저축은 개인에게 부자가 되는 길이지만 전체가 더 많이 저축하면, 경제침체와 빈곤이 초래된다는 뜻이다. 저축보다 소비가 생산적이고 그래서 성장과 고용의 열쇠는 소비수요라는 게 새뮤얼슨의 생각이다. 정책의 역점도 투자를 통한 성장제고가 아니라 소비를 통한 완전고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저축을 비생산적이라는 케인스주의의 시각은 잘못이라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계나 백화점에서 마구 돈을 쓴다면 소비재 투자는 증가한다. 그러나 소비재 지출 증가는 병원 건설, 암 치료약 개발, 신상품 개발 등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들을 위해서는 소비가 아니라 저축이 필요하다.

새뮤얼슨 사상의 핵심적 오류는 저축은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경제에서 누출된다는 전제다. 그러나 저축은 혁신과 혁신의 도입을 위한 기금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저축이 많아지면 이자율이 하락해 기업들은 낡은 장비를 교체하거나 연구·개발, 신기술 개발에 투자한다. 자본재를 생산하는 여러 단계에 투자됨으로써 저축이 소득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소비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설명이다. 저축은 장기 성장의 핵심요체라는 이유로 역사가들은 저축에 대한 새뮤얼슨의 적대감을 의심한다. 1980년대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주요 국가만 보아도 저축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성장률이 높다. 소비는 번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세이의 법칙’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새뮤얼슨은 케인스의 혁명을 체계화하는 데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학에 수학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도입배경에 대한 그의 인식이 흥미롭다. 그에게는 학계에서 내놓은 이론들이 논리도 엄밀하지 못하고 내용도 불명확하게 보였다. 경제이론에 엄밀성과 명료성을 자랑하는 수리를 이용하면 현대 경제학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새뮤얼슨은 소비이론, 비용이론, 생산이론 등 그동안 말로 표현된 경제이론을 수식이나 방정식을 활용해 간결하게 모델로 만들었다. 재정학, 국제무역 등 굵직한 주제들을 수리모형으로 제작해냈다. 경제학의 수리화가 곧 ‘과학화’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경제학은 물리학에서 배워야 한다고 큰 소리쳤다. 수리원리로 구성되지 않은 이론은 지적인 워밍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기도 했다. 새뮤얼슨이 경제학의 수리화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지만 그는 사회과학자로서의 경제학자가 아니라 공학자로서의 경제학자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제학을 현실과 동떨어진 제2의 물리학으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이에크는 이를 ‘과학주의’라고 꼬집었다.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행동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물리적 세계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새뮤얼슨의 시장관도 흥미롭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핸들 없는 자동차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에게 시장실패는 있어도 정부실패는 없다. 그래서 최선의 경제체제는 자유주의가 아니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강력한 규제와 간섭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대공황의 예를 들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환상이라고 역설한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등 미국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이끌었다는 이유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긍정적 평가도 흥미롭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대공황은 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보호무역과 가격규제 등 정부가 무모하게 개입한 탓이었다는, 그리고 그 개입의 중심에는 루스벨트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했다고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새뮤얼슨은 세계화의 속도를 줄이라는 요구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자유무역은 미국의 소비자들에게는 유익하지만 비숙련 미국 노동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중국의 비약적인 성장에 미국이 불안을 느끼고 있는 판국에 그런 주장은 학계와 정치권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새뮤얼슨의 사상은 다양한 비판의 여지를 남겼지만 그는 두 가지 점에서 경제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그는 케인스가 내놓은 거시경제학을 체계화해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에 수학의 원리를 도입해 수리경제학을 확립한 공로도 높이 인정받고 있다.

새뮤얼슨 사상의 힘 - 미국인 최초 노벨경제학상 수상…프리드먼과 세기의 대결도

폴 새뮤얼슨만큼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드물다. 그는 1989년 옛 소련이 붕괴되기 3개월 전까지도 소련과 같은 명령경제도 번영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1930년대 초부터 줄기차게 사회주의는 망한다고 설파, 이를 적중시킨 미제스와 하이에크 등의 오스트리아학파를 주류경제학에서 밀어낼 만큼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새뮤얼슨의 힘으로 소비함수, 승수효과, 국민소득 통계 등 거시경제학의 관심과 연구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그가 다듬고 매만진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은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에 저널리즘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국의 경제학을 경제공학으로 만든 것도 새뮤얼슨의 영향이다.

오늘날 대학의 경제학 교육에서 수리·계량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필수과목으로 만든 것도 새뮤얼슨이다. 경제논문을 일반인에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 것, 수학을 못하는 사람에게 경제학이 어려운 학문으로 비치게 된 것, 경제학을 상아탑으로 밀어 넣은 것 등도 새뮤얼슨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새뮤얼슨은 밀턴 프리드먼과의 세기적 대결로도 유명하다. 그는 경제자유를 신봉하는 시카고 학풍을 정신분열증이라고 말하면서 재정정책과 적자예산은 시장경제를 조종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설파한다. 프리드먼은 시장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있다고 반격하면서 적자를 통한 정부 지출의 효과가 미미하고 적자만 늘어 경제에 치명타를 준다는 이유로 정부 지출을 반대한다. 이런 논쟁에서 1960년대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집권으로 새뮤얼슨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프리드먼의 사상은 밀려난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새뮤얼슨의 사상은 케네디 정부 성장계획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졌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증가로 미국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케인스주의 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새뮤얼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학문적 사단이 대통령 경제자문을 맡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새뮤얼슨이 직접 프리드먼에게 반격을 가할 기회였지만 이미 프리드먼은 세상을 떠났다. 흥미롭게도 새뮤얼슨은 금융위기 원인을 금융시장의 규제 부족에서 찾고 있다.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재정지출 증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