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붓끝에서 백로가 날고 단원 손끝서 복사꽃 피었네…

12~31일 조선 거장들 '꽃과 새, 풀벌레…'展
스물아홉 나이로 인조반정에 참여한 창강 조속(1595~1668)은 세속적인 명리를 버리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했다. 아름다운 산천을 시화로 그려내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은 그는 기존의 중국 화풍보다 조선 고유색을 중시했고, 영모(翎毛)·매죽(梅竹)·산수(山水)를 잘 그렸다. 조속에 의해 시작된 조선 고유의 진경화풍은 심사정, 공재 윤두서를 거쳐 겸재 정선이 꽃을 피웠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자하 신위 등을 거쳐 오원 장승업으로 이어졌다.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은 오는 12~31일 조선 후기에 활동한 이들 진경산수화가 23명의 화조(花鳥)와 영모 그림을 모은 ‘꽃과 새, 풀벌레, 물고기가 사는 세상’전을 연다. 박주환 동산방화랑 회장의 소장품과 미술 애호가 6명에게 빌려 온 80여점을 선보인다. 정선의 ‘백로도첩’과 김홍도의 ‘수묵·초목·충어화첩’, 신윤복의 ‘화조도첩’, 심사정의 ‘꽃과 나비·풀벌레 화첩’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대표작은 겸재가 평생 교유한 당대 유명 시인 이병연(1671~1751)이 백천군수로 있을 때 그려준 10폭짜리 ‘백로도첩’. 쪽물을 들인 한지에 쇠백로를 활달한 필치로 그려넣고 연잎, 연꽃, 자라풀, 갈대 등을 배경으로 묘사했다. 화폭마다 다양한 자태와 표정을 묘사한 백로 그림은 세밀화에도 능했던 겸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원 그림으로는 1784년에 만든 ‘수금·초목·충어 화첩’에 실린 10점이 나온다. ‘갈대꽃과 게’는 1784년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으로 갔을 때 임청각 주인 이의수에게 그려준 수작이다. 여백의 미를 과감하게 살린 데서 단원의 천재성을 알 수 있다. 죽순과 오죽, 죽내버들과 매미, 황쏘가리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에서도 단원의 당당한 필력이 느껴진다.

특히 화첩 발문에 ‘김홍도는 洛城(낙성) 河梁人(하량인)’이라고 적혀 있어 단원이 서울 출신임을 짐작하게 한다. 낙성은 한양, 하량은 청계천을 뜻한다는 점에서 김홍도가 살던 곳을 구체적으로 지목한 유일한 자료다. 단원이 안성 출신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게 화랑 측의 설명이다. 혜원의 ‘화조도첩’에 실린 흑고니, 와버들과 왜가리, 버드나무와 팽나무 등의 그림은 한국적인 자생 식물과 동물을 생동감 있게 잘 녹여냈다. 파랑까치, 모란, 제비패랭이꽃, 멧비둘기 등을 묘사한 창강의 ‘화조도첩’, 소나무에 앉은 황조롱이와 토끼를 그린 장승업의 작품, 석류나무와 꿩 등을 그린 심사정의 화첩, 제주도의 한란을 그린 이하응의 작품 등도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유명 화가들이 직접 보고 그린 토종 동식물 그림에서 조선 시대 사실주의 회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다”며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장과 이정우 한국관상조류협회장의 조언을 받아 일일이 국내 자생 식물들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02)733-5877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