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청년실업과 잠곡 김육

토굴 속에서 7명 식구 살림
41세에 첫 벼슬…영의정까지
잠곡의 치열한 삶 새겨봐야

정선용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요즈음 언론 보도를 접하다 보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소식보다는 우울하게 하는 소식이 더 많다. 그중에도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하는 소식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극도의 좌절감에 싸여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대졸자의 취업률은 56%라고 한다. 계약직이나 임시직 성격의 취업자도 포함한 숫자라고 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까지 따져 보면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로 고통과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이다.취업문제만이 아니다. 한때 유행하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란 말에서 더 나아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했다는 의미의 ‘삼포’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는 이 말, 정말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한번쯤 돌아봐야 할 선인이 있다. 바로 잠곡(潛谷) 김육(金堉)이란 분이다. 다음은 잠곡의 일화를 기록한 글이다.

“잠곡이 미천하였을 적에 가평의 잠곡으로 가 숨어 살았다.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곳의 지명을 따라서 지은 것이다. 처음 이사하였을 적에는 집이 없었다. 땅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시렁을 얽어 움집을 만든 다음, 그 속에서 처자식들을 살게 하였다. 그러고는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밤이면 관솔불을 켜놓고 글을 읽었다.”잠곡은 중년의 나이에 집 한 칸이 없어 토굴을 파 움집을 만들고는 그 속에서 살았다. 잠곡은 2남4녀를 두었다. 모두 8명의 식구가 토굴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느 날 공의 부인이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다가 말하기를, ‘저기 저 푸른 도포를 입고 오는 사람은 모습이 마치 새신랑 같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사위가 되려고 오는 사람이오’라고 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어찌하여 저한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미리 말했다 한들 뭘 장만할 수 있었겠소’라고 했다. 부인이 딸을 쳐다보며 ‘버선이 없어 맨발이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니, 공이 자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서 딸에게 신게 했다. 푸른 도포를 입고 오던 사람이 새신랑의 옷으로 갈아입고서 굴 밖에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공은 우물에서 물을 한 사발 떠다가 굴 안에 놓은 다음, 옷을 갖춰 입고서 나가 읍을 하고는 신랑을 맞이하여 굴 안으로 들어왔다. 새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 예를 행하고는 드디어 떠나갔다.”

잠곡은 딸을 시집보내면서 버선 한 짝이 없어 자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딸에게 신기고, 아무런 음식도 차리지 못한 채 우물물 한 사발만 떠놓고 시집보냈다. 발에 맞지도 않는 때가 꼬질꼬질한 버선을 신겨서 시집을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잠곡의 젊은 시절은 다른 사람으로서는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15세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21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인부를 살 돈이 없어 자신이 직접 무덤을 파고서 장사지냈다.

잠곡은 그런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공부해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급제해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해 가평의 잠곡으로 이사해 살았다.

잠곡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이때 잠곡의 나이는 41세였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잠곡은 고생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직무에 종사했다. 마침내 72세 때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올랐고 자신의 집안을 조선 최고 명문가로 만들었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의지의 한국인’인 것이다.우리의 삶은 대부분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법이다. 만약에 어려운 삶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잠곡이 겪은 만큼의 고통 속에서 잠곡이 행했던 만큼의 치열한 삶을 살았는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도가 잘못된 것이며, 세상의 도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잠곡만큼 치열하게 살지도 않았으면서 좌절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부터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정선용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