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R&D 4.0' 시대…감동 팔려면 기술에 예술·인문학 입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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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로 일자리 빅뱅 (5) 융합 DNA가 창조경제 밑거름
기술+기술 '단순 융합' 탈피
상상력과 스토리 이끌어 낼 혁신 출발점은 이종분야 융합
국가 R&D 시스템 개선을
틀에 갇힌 과제가 창의력 막아…실패 용인하고 경험 중시해야
지난달 24일 열린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파이 이야기(Life of Pi)’가 감독상, 시각효과상 등 4개 부문 트로피를 휩쓸었다. 좁은 구명보트 안에 남게 된 인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가 227일간 망망대해에서 겪는 환상적인 체험을 3차원(3D) 영상으로 구현한 영화다. 2001년 출간된 원작 소설은 판타지에 가까운 상황 묘사로 영화화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손꼽혔다. 정보기술(IT)을 총동원해 12년 만에 스크린으로 옮긴 파이 이야기는 소설을 뛰어넘는 감동과 황홀경을 안겨줬다는 평을 받았다.
창조경제 구현의 밑거름이 되는 융합의 가장 큰 힘은 새로운 가치 창출이다. 단순히 기술과 기술의 융합을 넘어 기술과 예술, 기술과 인문학 등 이종(異種) 분야 간 창조적 융합은 파이 이야기와 같은 혁신적이고 감동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선진국 기술을 모방하며 따라가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시장 선도자(first mover)’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민간 및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에도 이 같은 융합 패러다임이 접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융합으로 신성장 엔진 만들어야
이스라엘 경제의 강점을 분석한 책 ‘창업국가’를 번역한 윤종록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원 교수는 최근 한 강연에서 “미국 경제는 늙은 소의 젖을 쥐어짜듯 마르기 직전이지만, 이스라엘은 젊은 송아지가 끊임없이 태어나는 창조경제가 꿈틀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에선 제품에 서비스를 더하고, 서비스에 솔루션을 더하는 융합형 사고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창출하고 활발한 창업 도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낳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 기능 향상 차원의 기술 혁신만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가가치나 이윤을 내기 어렵다. 중국 산업기술 수준은 이미 한국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고, 선진국 간 경쟁도 심해져 한 제품의 경쟁력 우위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창조적 혁신을 불러오는 융합형 R&D가 주목받는 이유다. 기술과 기술을 융합하며 선진 기술을 쫓던 ‘R&D 3.0시대’를 접고, 기술과 예술·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판을 만드는 ‘R&D 4.0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용근 산업기술진흥원장은 “기술적 가치에 인문학적 가치를 결합하는 융합 패러다임 구축을 통해 산업 생태계의 근본적인 체질을 바꿔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인문’ 융합이 명품 혁신의 토대
“솔직히 매우 실망했습니다. 기술 수준도 거기서 거긴 데다, 사업 아이템도 틀에 박힌 듯 천편일률적이더군요. 100여개 가까운 참가팀이 모두 하나의 팀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올해 초 전국 대학생 창업경진대회 심사를 맡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R&D 관련 기관 담당자가 털어놓은 얘기다. 기술은 물론 상상력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남식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술인문융합창작소장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방영한 공상과학 드라마 ‘스타트랙’에 나온 기술의 80%가 50여년 만에 모두 현실화됐다”며 “엔지니어들에게 상상력을 줄 수 있는 예술과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휴대폰과 컴퓨터, 음반시장(아이튠즈), MP3플레이어를 하나로 묶은 아이폰 혁신은 “애플은 제품이 아니라 감동을 판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기술과 예술·인문학 융합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이기섭 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은 “우리가 평상시 쓰는 컴퓨터 마우스는 컴퓨터를 얼마나 ‘빠르게 돌릴까’라는 고민에서가 아니라 얼마나 ‘편리하게 사용하게 만들까’라는 인문학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시대를 바꾸는 기술 혁신은 이렇듯 대부분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국가 주도 R&D가 창의력 저해
산업계의 융합 패러다임 접목과 함께 국가 R&D 시스템 역시 창조경제의 흐름에 맞춰 대폭 손질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문제를 전부 내고 민간은 답만 푸는 방식의 현 R&D 시스템으로는 창조적인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밀도와 질량, 재질까지 정해놓고 컵을 제작하라고 하는 정부 주도의 R&D 과제 대신 ‘사용하기 편한 예쁜 컵을 만드시오’처럼 민간의 창의력을 자극할 수 있는 자율 기획형 R&D 과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 예산이 투입된 R&D 과제 실패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R&D 시스템도 차별화된 기술 개발을 막는 장애물로 꼽힌다.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정책관은 “국가 R&D 성공률이 90%에 가깝다는 통계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용이하고 평범한 과제 중심으로만 국가 R&D 예산이 집행됐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며 “실패를 용인하고 R&D 결과 대신 실패 과정에서 겪은 경험에 가중치를 두는 방향으로 R&D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
특별취재팀=김태훈 김형호 김병근 김희경 은정진(중기과학부) 이정호(경제부) 최진석(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