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120일 끈 '별장 性접대' 수사, 검·경 물밑 갈등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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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초기 대응 소홀…경찰은 '리스트' 슬며시 흘리고…
치정사건으로 끝날 것 같았던 건설업자·내연녀 고발사건, 동영상 CD 소문 돌며 파문 확산
수사 지연시킨 검찰 공격하려 경찰이 명단 유출說도…파문 어디까지 튈 지 관심
“허, 저한테만 언질이 없네요.” 지난 14일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대 졸업식에 참석하던 날 오전, 김기용 전 경찰청장은 ‘때이른’ 지인의 유임축하 전화를 받았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말 대선 당시 경찰청장 임기 보장을 약속했던 터라 김 전 청장의 유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날 정부는 오전 발표 예정이던 검찰총장 등 외청장 인사를 뚜렷한 이유 없이 연기했다. 외청장 내정자 가운데 최종 검증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등 해석이 분분했지만 경찰청장 교체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0시 한 방송뉴스를 통해 사회지도층 인사의 초호화별장 성접대 보도가 처음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외청장 인사 연기, 다음날 경찰청장 전격 교체, 김학의 법무부 차관의 사퇴로 이어진 성접대 의혹사건의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차관이 임명 8일 만에 자진 사퇴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경찰은 법무부의 2인자까지 사퇴한 마당에 혐의를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할 경우 ‘무리한 수사’라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경찰이 첩보 수집 단계인 내사사건을 본격적인 수사로 전환한 지 3일째인 22일 ‘의혹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김 차관을 포함해 전현직 검찰·경찰·감사원·국가정보원 고위직과 전 국회의원, 대학병원장 등 10여명으로 늘어났다. 검찰 내부에선 김 차관의 사퇴와 관련, “경찰이 의혹 연루자에 대한 실명을 흘리는 등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있다”고 경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경찰은 “수사의 목표는 김 차관이 아니라 건설업자 윤모씨에게 성 접대를 받은 여러 인사들”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고소로 이어진 윤씨와 내연녀 간 파탄이 시발점
김 차관의 자진사퇴로 이어진 사회지도층 인사 호화별장 성접대의혹 사건은 일선 경찰서에 하루 수십건이 접수되는 남녀간 치정사건이 발단이 됐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경찰서에 접수된 한 여성의 성폭행·공갈협박 고발 사건은 검찰의 무혐의 처분으로 자칫 덮일 뻔했다가 지난 14일 외청장 인사를 앞두고 불거지면서 핫 이슈가 됐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대형 게이트로 번질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향후 파장을 예상키 어려운 이번 사건이 처음 시작된 지난해 11월부터 김 차관이 사퇴한 21일까지 120일 과정을 되짚어 봤다. 유부남인 윤씨와 이혼녀 권씨는 내연 관계였다. 허리가 좋지 않았던 윤씨가 강남의 한 허리교정업소 회원으로 등록했고, 이곳 회원이던 권씨와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6개월 정도 동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건설경기 악화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권씨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윤씨의 아내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휴대폰 동영상을 발견하고 지난해 10월 간통혐의로 고소했다.
윤씨와 권씨 사이도 금전관계가 개입되면서 틀어졌다. 권씨는 지난해 11월 경찰에 윤씨를 성폭행·공갈 혐의로 고소했다. 권씨는 경찰 조사에서 윤씨가 자신에게 약물을 먹여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고, 이 장면을 찍은 동영상으로 협박해 15억원과 벤츠 승용차를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윤씨의 별장 주변을 압수수색해 공기총과 일본도 등을 확보했다. 경찰은 윤씨를 긴급 체포하고 강간 및 공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했다. 이에 경찰은 윤씨의 강원 원주시 부론면 별장을 압수수색해 나온 불법 총기 등을 근거로 지난달 총포도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남녀상열지사 왜 로비사건으로 비화됐나
단순 치정 사건으로 끝날 것 같았던 윤씨와 권씨의 다툼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권씨는 사업가 P씨를 해결사로 고용, 윤씨에게 빼앗긴 벤츠 승용차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P씨는 부하 2명과 함께 견인차를 동원해 빼앗아 왔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 유력인사가 등장하는 성관계 동영상 CD 7장이 차의 트렁크에서 발견됐다. P씨는 승용차를 권씨에게 돌려주지 않고 팔아버렸다. 이후 차량을 돌려달라는 권씨에게 문제의 동영상을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내면서 “당신 것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협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내용이 경찰의 고소사건 수사 과정에서 흘러나왔고 사정기관 등에 ‘김 차관의 성접대 동영상이 유출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권씨는 고소 사건이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게 윤씨와 친분이 있는 사정기관의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이가 틀어지기전 윤씨는 권씨에게 고위 관료들과의 친분을 자주 자랑했기 때문이다. 권씨는 주변 지인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 과정에서 성접대 동영상의 존재도 알렸다. 이런 사실은 법조계를 중심으로 은밀히 퍼져나갔다. 한 유력인사가 수억원을 주고 동영상을 돌려받았다는 얘기가 나돈 것도 이때쯤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도 김 차관의 연루에 대한 검증에 나섰지만 경찰 수뇌부로부터 사실 무근이라는 답변을 듣고 추가 조사를 접었다. 검증을 맡은 민정수석실 인사들이 검찰 출신이라 검증과정이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유임이 확실했던 김 전 청장이 교체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경찰이 신청한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검찰도 윤씨 관련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입장을 바꿔 수사 파일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달 말 서초경찰서로부터 사건을 넘겨 받아 지금도 수사하고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검·경 수사권 갈등의 연장인가
성접대 의혹 사건이 불거진 이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직은 검찰과 경찰이다. 경찰은 유임이 확실시되던 수장이 성접대 사건의혹이 처음 터져나온 뒤 곧바로 경질됐다. 성 접대 로비 의혹을 제대로 보고 하지 못한 게 교체 배경으로 알려졌다. 1주일 뒤엔 성접대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아오던 법무부 차관이 자진 사퇴했다. 이를 두고 이번 사건은 검·경 수사권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윤씨와 권씨의 소송사건을 맡은 경찰이 고위직 관련의혹을 제기하며 기소의견을 달아 올린 사건을 검찰 측이 깔아뭉개자 이를 일부 언론에 흘려 공격에 나섰다는 것.
경찰이 수사 내용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제 수사를 자제하고 있었단 얘기도 이래서 나온다. 강제 수사를 하기 위해선 검사의 지휘를 받고 수사 내용을 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상관이 연루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하기 힘들다는 불신이 작용했다는 것. 경찰은 지난 21일 수사관들을 원주의 별장에 보내 시설과 구조를 파악했다. 동영상에 나오는 화면이 원주 인근 윤씨의 별장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경찰은 별장의 문이 잠겨 있고, 관리인도 없어 현장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별장 안을 수색할 수 있는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 내부에선 경찰의 수사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한 부장급 검사는 “검찰도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의식이 많이 좋아져서 고위 간부급의 이름을 언론에 슬쩍 흘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며 “그런데 경찰은 틈만 나면 수사 진행상황을 특정 언론사에 흘려주고, 자극적으로 보도가 나가게 허용한다”고 불쾌해했다. 다른 관계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며 “검찰에서도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부인하지만 이 일로 검찰과 경찰이 또 한번 갈등할지 주목된다.
김우섭/정소람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