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펭귄 +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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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뉴욕 뒷골목을 쏘다니던 청년의 별명은 족제비였다. 월 스트리트의 증권브로커 사무실에서 일할 때 걸핏하면 근무지를 이탈해 쏘다니는 바람에 얻은 이름이다. 본명은 베넷 서프였지만 타고난 ‘제멋대로 기질’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스물다섯 살에 출판계에 제멋대로 뛰어든 그는 몇 년 뒤 아예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을 펴내기 위해 ‘내멋대로 출판사’란 뜻의 랜덤하우스를 세웠다. 이후 외설 혐의로 금서가 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영미권 국가 최초로 내며 급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21억유로(약 3조700억원)로 사상 최대였다. 그보다 일곱 살 어린 영국 청년 앨런 레인. 수많은 젊은이처럼 그도 늘 주머니가 얇아 걱정이었다. 어느 봄날, 친구를 만나러 지방에 갔다가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그러나 양장본 서적들은 모두 비쌌다. 망설이던 그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새로운 개념의 보급형 문고판을 만들었고 책값도 12분의 1로 낮췄다. 1935년 펴낸 6펜스짜리 문고본은 대환영을 받았다. 펭귄북스의 시작이었다. 펭귄북스의 성공 덕분에 전 세계에서 페이퍼백 붐이 일어났다. 1970년에 영국 피어슨 그룹에 합병된 이후에도 펭귄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두 출판사가 지난해부터 합병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동안 합병에 반대했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입장을 바꿔 지난 5일 승인조치를 내림에 따라 이들의 합병은 연내 성사될 전망이다. 새 회사인 펭귄랜덤하우스는 세계 최대 규모 출판사로 영미 출판시장 점유율도 25%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자책 시장 공략을 위한 기업 역량도 훨씬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계적인 출판사들의 몸집 불리기 행진을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출판산업의 외형은 세계 7위이지만 내용은 속빈 강정이다. 콘텐츠의 절대부족이 약점이다.
전자책 부문은 더욱 심하다. 외국 출판사들이 전자책 저작권을 아예 불허하고 있는 점은 상황을 부채질한다. 정부가 추진한 500억원짜리 ‘출판진흥기금’도 작년 국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오죽하면 단행본 출판사들이 책값의 1%씩을 떼어 출판진흥기금 5000억원을 만들겠다고 나섰을까.
지구촌 거대 콘텐츠기업의 움직임을 보면서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구 10만명당 공공도서관 숫자도 러시아 32.85개, 독일 12.20개, 영국 7.43개, 중국 3.83개인 데 비해 우리는 1.24개밖에 안되는 게 현실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