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는 없다.”

1950~60년대 ‘아~, 신라의 바-하-함이-히-여’라는 특유의 떨림 창법으로 ‘국민가수’가 된 현인(본명 현동주)은 원래 성악가였다. 처음엔 성악가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웠지만, 결국 성악과 ‘뽕짝’의 경계를 뛰어넘는 ‘가인(歌人)’이 됐다. 선생은 1919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영국 석유회사에 다니던 아버지와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풍족한 유년을 보냈다. 소학교 5학년 때 상경, 1938년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일본군이 되는 데 대한 부담으로 포기했다. 대신 일본으로 가 우에노음악대학에 진학, 성악과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선생이 가수가 된 것은 작곡가 고(故) 박시춘 씨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1947년 시공관(현 국립극장)에서 ‘신라의 달밤’을 처음 불렀고, 관객들은 그의 남성적인 목소리와 특유의 창법에 열광했다. 연이어 내놓은 ‘비내리는 고모령’은 그를 국민가수로 만들었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선생은 ‘총 없는 전사’가 돼 전장을 누볐다. 1·4후퇴 때 실향의 애환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9·28 서울수복의 기쁨을 ‘럭키서울’로 노래했다. ‘베사메무초’ 등 외국곡도 번안해 히트시켰고 ‘서울야곡’ 등 곡을 직접 쓰기도 했다. 81세이던 2000년 봄까지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할 정도로 건강했던 그는 2002년 갑자기 찾아든 당뇨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 11년 전 오늘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