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4대 천왕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1980~1990년대 홍콩 영화계는 이른바 ‘4대 천왕(天王)’의 시대였다. 류더화(劉德華), 장쉐여우(張學友), 궈푸청(郭富城), 리밍(黎明)이 그들이다. 이들은 외모와 연기는 물론 노래까지 출중했다. 한류가 뜨면서 장동건 송승헌 이병헌 원빈이 ‘한류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는 ‘트로트 4대 천왕’으로 장기집권 중이다.

중국에선 실력이 뛰어나고 영향력이 큰 인물들을 흔히 4대 천왕이라고 부른다. 4(四)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 기피하지만 4대 천왕은 예외다. 인도 불교에서 유래한 4대 천왕은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는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4대 천왕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須彌山) 허리에서 동서남북 4개 문을 지킨다. 동쪽의 지국(持國)천왕, 남쪽의 증장(增長)천왕, 서쪽의 광목(廣目)천왕, 북쪽의 다문(多聞)천왕이 있다. 손에 든 물건(持物)과 얼굴 색깔로 구분된다. 칼을 든 지국천왕은 기쁨과 봄을 관장하며 푸른색을,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은 사랑과 여름을 주관하며 붉은색을 띤다. 흰 얼굴의 광목천왕은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분노와 가을을, 검은색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즐거움과 겨울을 각각 상징한다.

국내 사찰에도 예부터 초입의 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사천왕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천왕상을 모셨다. 눈을 부릅뜨고 험상궂은 얼굴을 한 4천왕은 부처, 불법, 승려, 불자를 지킨다. 외부의 악한 기운이나 침입자를 막아 청정도량을 유지한다는 의미다.

숫자 4는 완성, 안정감 등의 느낌을 줘 고대부터 중요한 숫자로 취급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로 흙, 물, 공기, 불을 꼽았다. 성경은 4대 복음이요, 요한계시록엔 4명의 말 탄 기사가 등장한다. 교향악은 현악, 금관, 목관, 타악 등 네 가지 악기군(群)으로 구성된다. 셰익스피어의 무수한 걸작 중에서도 4대 비극(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이 백미다. 4대 비극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빠진 것은 비극적 결말이 4대 비극처럼 개인의 성격 결함이나 그릇된 선택이 아니라 집안 탓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걸리버는 릴리퍼트(소인국) 브롭딩낵(대인국) 라퓨타(하늘을 나는 나라) 휴이넘(말의 나라) 등 4개 나라를 여행했다. 셋 이하는 모자라고, 다섯 이상은 넘쳐보이니 네 가지 또는 넷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사퇴 압력을 받아온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이 결국 엊그제 사의를 표명했다. 소위 금융계 4대 천왕 중 김승유(하나), 강만수(산은) 회장이 물러났고 어윤대(KB) 회장도 곧 임기만료다. 이로써 인치(人治)는 막을 내리게 됐지만 또 다른 관치(官治) 회귀라는 논란도 있다. 어쨌든 4대 천왕은 대중스타 정도면 족하지 싶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