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만도 '신뢰 충격'이 남긴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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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광 증권부 기자 ahnjk@hankyung.com지난 주초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에는 각 업종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모여 한라건설의 자금줄 역할을 누가 할지를 놓고 토론하고 있었다. 한라건설은 당시 3800억원 규모의 제3자 배정 방식 유상증자를 이사회에서 결의한 뒤 ‘투자자를 찾는 중’이라고 공시해 놓은 상태였다.
건설 담당 애널리스트가 범 현대가인 현대자동차그룹을 지목하자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는 펄쩍 뛰며 “한라건설의 주요 주주사인 KCC그룹이 유력하다”고 맞받았다. 한라건설의 자금줄을 맡는 기업 주가는 폭락할 것으로 우려됐기 때문에 서로 ‘폭탄’이 피해 가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이 ‘폭탄’은 결국 만도가 떠안게 됐고, 만도 주가는 지난 12일부터 나흘 동안 약 26% 하락했다. 기관투자가와 소액 투자자들은 주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펀드를 운용하는 기관은 리스크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탓에 고객들로부터 추궁당할 처지에 몰렸다. 만도 지분 9.24%를 갖고 있는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자금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대응에 나선 이유다. 지분 9.7%를 보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은 주주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판단될 경우 지분 매각과 소송을 벌일 가능성이 점쳐진다. 소액주주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네비스탁은 “우량한 기업을 오너가 마치 사(私)금고처럼 이용한 꼴”이라며 “주총 때 주주들이 만도 이사진의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라그룹은 총수까지 나서 주주 달래기에 나섰다. 정몽원 회장은 지난 16일 만도 주식을 장내에서 1300주 매수한 데 이어 17일에도 1200주를 샀다. 만도의 신사현 부회장, 최병수 사장, 이권철 상무 등 임원들도 주식 매수에 동참했다. ‘책임 경영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셈이다.
한라그룹으로선 최악의 업황을 감안할 때 한라건설에 수천억원을 대줄 투자자를 찾기 힘들었을 듯하다. 만도를 끌어들인 고육책(苦肉策) 속엔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그룹 전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한라그룹의 경영 판단이 주주가치를 훼손한 것인지 평가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그러나 시장 참여자들은 큰 상처를 입었고, 혼란스러워 한다. 한라건설의 경영 정상화를 앞당기는 것만이 무너진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안재광 증권부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