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中企대통령'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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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중소기업부 차장 psj@hankyung.com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김대중 후보는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만이 자주경제를 이룰 수 있다”며 획기적인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약속했다. 이젠 빛바랜 그의 공약집 속엔 아직도 중소기업청의 부(部) 승격, 지방·벤처기업 육성, 신용 위주 중소기업 대출관행 정착 등의 약속이 굵은 글씨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도 “나는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을 인생 철학으로 삼고 있다”며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당당하게 발언하는 나라가 되도록 부당한 제도를 고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 17대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대단한 혁명은 필요 없다. 중소기업이 사업하면서 필요한 것을 조용히 변화시키면 된다”며 ‘전봇대 뽑기’로 알려진 현장 중심형 규제 개혁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화려한 공약’에 ‘큰 실망’ 거듭
대선 때마다 후보들의 약속은 장밋빛처럼 화려했고, 그에 환호했던 중소기업인들의 실망은 기대감만큼 컸다. ‘더 이상 정치인들의 수사에 기대를 걸지 않겠다’고 했던 이들이지만 지난해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을 때는 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대감은 지난해 12월26일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대기업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제치고 중소기업중앙회를 먼저 찾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 당시 분위기는 대선 직후 중소기업인 1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8%가 “박 당선인의 국정운영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고 답한 데서 읽을 수 있다.
그로부터 4개월. 중소기업 현장 분위기는 ‘환호와 기대 뒤 실망’이라는 과거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중소기업인들은 대기업들의 상생협력 약속에도,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 경쟁에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학습효과다. ‘정부가 초반에 분위기 잡으면 대기업과 금융권이 얼마간 장단을 맞춰주는 게 순서고 관행 아니냐’는 게 이들의 인식이다. 두 번째는 엄중한 현실 때문이다. 중기인들이 대선 공약에 환호하고 있는 동안 대내외 경영상황은 더 악화됐다.
뼈를 깎는 자구책이 해답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의 매출이 6개월 연속 떨어졌고, 소상공인의 56%는 지난해보다 소득이 떨어져 기한 내 이자 빚도 못 갚고 있다는 통계다. 국민연금도 못 내는 사업장이 40만곳에 달하고, 1월에만 1만4000곳이 늘었다고 한다. 정부가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고 하지만, 수출 중소기업들은 환율문제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어려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파티는 끝났다. 중소기업인들은 엄중한 현실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들고 ‘각자도생(各自圖生)’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중소기업 대통령’ 약속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박 대통령은 중소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의 틀 안에서 자생력을 갖고 글로벌 기업으로 커나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줘야 한다. 그러나 기업들은 일단 ‘중소기업 대통령’을 잊는 게 좋겠다. 그런 맥락에서 전자부품업을 하는 기업인 A씨의 말이 울림 있게 들린다. “중소기업 대통령이요? 기업활동 자체가 누굴 믿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한푼이라도 원가절감하고 더 나은 기술을 연구하고, 새 거래처를 뚫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어떤 대통령이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수진 중소기업부 차장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