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공포의 5월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누가 4월을 잔인하다고 했던가요. 현대를 사는 도시인은 5월이 끔찍합니다.” 5월을 맞아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 한국의 직장인들에겐 ‘공포의 5월’이 돼 버렸다. 이유는 짐작하는 대로다. ‘가정의 달’에 두루 챙기고 선물해야 할 온갖 기념일이 다 몰려있는 탓이다.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21일 부부의 날에다 쌓이는 청첩장, 아이들 소풍까지…. 가족의 생일, 결혼기념일이라도 끼어 있다면 지갑에 구멍이 날 판이다. 당장 어린이날부터 걱정거리다.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어린이들이 받고 싶은 선물 1위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이 스마트폰이다. 이어 게임기, 장난감, 애완견의 순이다. 게다가 다 큰 20대 자녀들마저 은근히 선물을 기대한다. 방정환 선생을 탓할 수도 없어 한숨만 짓는 직장인이 많다.

어린이의 천국이라는 미국엔 정작 어린이날이 없다. 대신 마더스 데이(5월 둘째 일요일), 파더스 데이(6월 셋째 일요일)가 있을 뿐이다. 왜 어린이날이 없는 걸까. 나머지 363일이 모두 어린이날이니까. 차라리 어린이날을 하루 정해 놓은 게 낫다고 여기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곧 이어서는 어버이날이다. 양가 부모 네 분을 챙겨야 할 입장이라면 편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부모님이 선호하는 선물 1위가 현금이란다. 그래도 고향 부모님이 학수고대하는 것은 선물이나 용돈이 아니라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자식들이 아닐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스승의 날이다. 이날 재량휴업을 하거나 선물을 금지한 학교가 많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암묵적으로 5월을 피해 4월이나 6월에 선물하는 학부모도 많다고 한다. 스승의 날을 학년이 끝나는 2월로 옮기자는 논의가 한때 있었지만 흐지부지됐다.

세태도 많이 달라졌다. 신세계몰이 지난해 30~40대 고객 59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보면 스승의 날 선물할 대상으로 담임교사(23%)보다 학원강사(40%)를 꼽은 사람이 월등히 많았다.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는 가정이 늘면서 어린이집 교사(12%)도 선물할 대상에 올랐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200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된 부부의 날은 또 어쩔 것인가. 5월 지출이 워낙 컸으니 이 날은 그냥 밥이나 먹자는 부부들도 많을 것 같다. 공포의 5월을 보낸 가장이 마지막 31일에 담배라도 한 대 피워물었다간 가족들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금연의 날이니까. 지갑 얇아지는 게 두렵다고 가족의 소중함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어린 자녀가 고사리손으로 그려준 아빠의 얼굴, 사춘기 자녀가 쓴 “부모님 사랑해요”라는 편지 한 통이라면 그까짓 돈 걱정쯤이야.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