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경찰팀 리포트…100억대 기름이 사라졌다

"한 번에 많은 양 산다"며 정유사에는 외상으로 주문
"싼값에 기름 주겠다" 유혹…주유소에선 돈 받아 챙겨
대리점 난립으로 시장 혼란…대형 사기사건 잇달아
기름 중간판매상(부판대리점) D사에 선금을 주고도 기름을 받지 못한 서울 시내의 한 피해주유소. 이 주유소는 8000만원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최근 피해자 모임에 참여해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 지난달 1일 서울북부지검 형사5부로 ‘100억원대 기름 증발’ 사건이 배당됐다. 고소인은 경유를 주유소에 제공하는 업체인 S사와 일반주유소 등 다수. 피고소인은 정유업체나 정유업체의 직영대리점으로부터 경유 등유 등을 싸게 사서 일반주유소에 파는 중간판매상(부판대리점)인 D사 대표 박모씨(46). S사는 박씨에게 미리 17억원어치의 기름을 공급했지만 돈을 받지 못했고, 일반주유소는 박씨에게 미리 기름값을 건넸으나 제때 기름을 공급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S사와 일반주유소가 박씨에게서 떼였다고 하는 금액은 자그마치 100억원대. 검찰은 박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SK에너지 등 정유업체나 이들의 직영대리점에서 석유를 대량으로 공급받아 일반주유소에 싸게 판매하는 부판대리점의 난립으로 석유 유통시장이 일대 혼란을 겪고 있다. 부실화된 부판대리점이 늘어나면서 수십년 쌓아온 거래처와의 신뢰를 저버린 채 수십억원의 기름값을 떼먹고 달아나는 대형 ‘먹튀’ 사건이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01년 78개였던 부판대리점은 지난해 617개로 늘었다. 부판대리점과의 거래는 탈세를 노린 무자료 거래가 공공연한 관례여서 사기를 당하고도 금액이 크지 않으면 입을 닫는다고 수사당국은 전했다.
◆증발한 100억원…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박씨가 사전에 계획한 범행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의 고소인 중 한 명인 정모씨(53). 그는 서울 강남에서만 12년간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그는 20년 친구인 박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박씨는 “싼값에 기름을 제공하겠다”며 “대신 기름값을 먼저 지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씨는 D사에 2억3000만원을 지급했지만 기름을 받기로 한 지난 1월17일, 약속된 기름은 오지 않았다. 정씨와 박씨는 20년간 함께 ‘기름밥’을 먹었고, 신뢰 관계도 누구보다 두터웠다. 정씨는 “박씨 잠적 이후 피해 주유소와 공급업체를 만나 얘기를 듣고서야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날 경유공급업체 S사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D사에서 받아야 할 기름값이 입금되지 않았다. 두 회사는 지난해부터 한국거래소(KRX)의 석유전자상거래 시스템을 이용해 거래했다. 이 시스템은 매도인과 매수인이 물량과 금액을 협의한 뒤 매수인이 대금을 입금하면 매도인이 기름을 출하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날 D사는 S사 측에 “1월18일에 아침 일찍 나갈 물량이 있으니 17일 시스템 시작 전에 기름을 먼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석유전자상거래 시스템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50분까지만 운영된다. 장종료 이후 기름이 지급되면 주유소 공급물량을 맞추기 힘들다는 설명이었다.

무리한 요청이지만 S사는 D사와 쌓아온 신뢰 관계를 믿었다. 그리고 17일 새벽부터 물량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후 4시가 넘어 장 마감 때까지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S사 측은 부랴부랴 기름 출하를 중단시켰지만 예정 공급물량 중 70%가량이 나가고 난 뒤였다. 선출하한 기름은 시가로 17억원어치였다. ◆남해화학 등 대기업도 당했다.

박씨는 그동안 공급업자들에게 많은 물량을 받아가며 신뢰를 쌓았다. 적게는 1년 많게는 3년 정도 거래를 유지했던 터라 사고 당일 공급업자들은 무리한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S사 외에도 대금을 지급받지 못한 곳은 동부익스프레스 등 대기업도 포함돼 있다. 대기업들은 주로 제3자 담보를 설정하고 기름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과 S사를 포함한 공급업체의 피해는 44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씨와 같은 수법으로 당한 주유소 40곳과 아직 피해신고를 하지 못한 주유소의 피해액을 합치면 약 40억원에 이른다. 운송업체(2억원)와 박씨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7억원)의 피해액을 합치면 박씨의 횡령액은 100억원에 육박한다. 대리점 거래에서 기름이 증발한 사고는 또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남해화학이 430억원에 달하는 기름을 대리점에 넘겨줬다 돈을 받지 못한 사고가 터졌다.

국내 1위 비료업체인 남해화학은 유류사업도 일부 하고 있다. 남해화학은 S사와 달리 대리점과 거래 시 KRX 대신 직접거래로 유류를 유통했다. 기름을 공급할 때는 기본적으로 외상 거래를 이용했다. 대리점에 기름을 선지급하고 대금을 추후 받는 방식이다. 대신 은행을 통해 지급보증서를 받았는데, 당시 430억원어치에 달하는 기름에 대한 지급보증서는 위조된 것이었다.

◆부판대리점은 필요악…재발 소지 곳곳에

전문가들은 주유소에서 브랜드와 상관없이 석유를 팔 수 있는 기름혼합판매제가 허용되면서 부판대리점의 부실화는 예고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정부는 정유4사의 독점을 풀어 기름값을 인하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름혼합판매를 허용했다. 브랜드를 가진 주유소도 다른 브랜드의 기름이나 대리점 기름 등을 판매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주유소 간 가격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싼 기름을 공급하는 부판대리점이 크게 늘었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기름값을 낮추려고 대리점 물량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공급업체는 반대로 많은 물량을 확보하거나 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대리점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부판대리점과의 거래가 불안하긴 하지만 주유소나 공급업체가 거래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문제는 설립이 간단하고 사후 확인이 소홀해 검증되지 않은 부판대리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리점이 먹튀를 하거나 싼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가짜석유 등 탈세를 일삼는 경우가 늘고 있다.

부판대리점의 범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소송을 진행 중인 S사 관계자는 “처음 경찰에 신고했을 때 피해자가 많고 피해액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수사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았고, 불구속수사를 진행하면서 박씨에게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준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부판대리점은 세금 탈세를 위한 무자료 기름 및 가짜석유 유통의 온상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 서울북부지검은 무자료 기름 유통을 위해 5000억원대 허위 세금계산서를 전국 주유소에 발급한 대리점 업체 일당을 구속 기소한 바 있다. 무자료 기름은 정상적인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않고 유통되기 때문에 그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무자료 경유 2만ℓ를 공급하면 주유소는 50만~60만원가량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9월에는 1조원 상당의 가짜 석유를 만들어 유통시킨 일당이 경찰에 적발됐다. 이들 역시 대리점을 세워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 가짜석유를 불법 유통시켰다. 한 공급업체 관계자는 “가짜석유, 무자료거래는 부판대리점에서 여전히 성행 중”이라고 털어놨다.

■ 부판대리점부판은 ‘부분적으로 판매한다’는 뜻이다. 과거 ‘기름’ ‘가스’ 등의 간판을 내걸고 소규모로 연료를 공급받아 판매하던 동네 가게를 ‘부판점’이라 불렀다. 부판대리점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으로 정유업계에서는 정유업체(SK에너지 등), 직영대리점(STX에너지 등), 수입업체(남해화학 등)로부터 기름을 공급받아 일반 주유소에 기름을 유통하는 중간 판매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다양한 곳에서 기름을 납품받기 때문에 공급가격이 비교적 싼 편이다.

김태호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