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시장경제기반 흔드는 어둠의 용어들

일감몰아주기·납품가후려치기는 포퓰리즘이 낳은 언어조작일 뿐
정치적 주술 대신 시장을 믿어야

조동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언어는 존재가 머무는 곳이며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 인간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부리는 것이다.

‘일감 몰아주기’와 ‘납품단가 후려치기’만큼 현상을 왜곡하는 거친 말도 없다. 언어의 마술 앞에 재벌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악의 화신’으로 구조화된다. 거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개인은 ‘인지부조화’에 빠지며, 실패라는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지’를 바꾸게 된다. 내가 일감을 따내지 못한 것은 누군가에게 일감을 몰아줬기 때문이고, 납품단가가 낮은 것은 부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부당하게 가격을 후려쳤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여기에 ‘경제민주화’라는 요술방망이가 절묘하게 중첩됐다. 진위를 따질 겨를도 없이 “크고 강한 것은 부당하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정책 사고를 지배했다. 거친 용어는 오도된 정책을 낳는다.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최근 국회를 통과한 납품단가 부당인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키로 한 ‘하도급법 개정안’이 그 전형이다. 후려치기, 비틀기 등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논리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징벌적 배상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가해행위가 ‘의도적’이고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그런 가해행위를 적발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하도급거래에서의 납품단가 인하는 의도적 가해행위도 아니고 숨기거나 은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납품 가격을 둘러싼 이익 충돌은 일방이 전적으로 피해를 보는 가해행위와는 다르다. 사적 자치 영역인 협상에 ‘정당과 부당’의 잣대를 대는 것 자체가 무리다.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를 중립적으로 표현하면 계열사 간 ‘내부거래’이다. 기업이 생산을 ‘사업부제’로 할 것인가 ‘계열사 조직’으로 할 것인가는 기업이 판단할 몫이다. 따라서 내부거래를 백안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현재 공정거래법은 특정 계열사에 유·불리한 거래를 ‘불공정행위’로 간주해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특정 요건을 충족하는 거래만을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합리의 원칙’에서 벗어나 ‘과잉규제’로 치닫는 것은 ‘일감 몰아주기’라는 언어의 분노를 온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지배적 기업’과 ‘시장점유율’도 잘못된 표현이다. 시장점유율은 소비자의 선택을 나타낸 것이기에 ‘소비자선택률’이 맞는 개념이다. 시장지배적 지위도 과장된 것이다. 시장지배는 가공의 개념이다. 정치권력처럼 임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장(場)일 뿐 그 자체가 ‘행위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시장을 의인화한 “시장의 탐욕과 시장실패 그리고 시장권력”은 성립될 수 없는 ‘언어의 허구’다. 시장생태계는 가치사슬을 통해 다양한 경제주체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용어 그리고 시장의 본질과 그 운영원리에 반하는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부지불식간에 시장경제의 기반을 허문다. 이런 ‘어둠의 용어’는 국가의 시장개입을 불러들일 뿐이다. 경제민주화도 실은 국가의 시장개입을 위한 명분에 다름 아니다. 시장의 실패와 탐욕을 치유하고 ‘적자생존’이 아닌 ‘선자(善者)생존’을 실현하겠단다. 강자의 것을 덜어내 약자에게 옮겨주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정’을 표방하지만 실제는 인기영합이다. 이상적(理想的) 질서를 실현하기에 인간의 이성은 늘 제한돼 있고, ‘비시장적’ 정치적 타협이 도덕일 수는 없다.

분노와 어둠의 용어로 더 이상 국가 개입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가장한 경제민주화는 ‘국가개입주의에 지대추구행위’가 더해진 최악의 조합이 될 개연성이 높다. 시장을 신뢰해야 하는 역설적인 이유는 시장이 차라리 냉혹하기 때문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