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계급 사회' 경찰, 퇴직 후 일자리도 '계급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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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은 제복 벗어도 갈 곳 많아…경정급 이하는 재취업 허덕#순경으로 시작해 20여년간 경찰공무원으로 일한 A경위. 2008년 12월 서울 하계동 노원경찰서 근무를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별다른 직업 없이 2년 가까이 쉬다 2010년 11월 재취업에 성공했다. ‘제2의 인생’에 대한 꿈에 부풀어 들어간 코레일네트웍스에서 그가 맡은 일은 계약직인 주차요원. 자존심도 상하고 경찰 업무와도 무관했지만 ‘백수’보다는 낫다는 판단에 현실을 받아들였다.
총경급 이상 고위 간부들, 경비·건설업체서 '모셔가기'
계급정년 걸린 중·하위급
40대에 조기퇴직 내몰려 번듯한 일자리 찾기 어려워
취업 지원창구 마련 시급
#경찰청 외사국장 출신 B치안감. 군인으로 치면 장성급으로 퇴직한 그는 2010년 1월 제복을 벗고 1년여 만에 한 건설업체 대표로 취임했다. 경찰 재직 때 이사관(2급) 대우를 받다가 퇴직 후 사기업에 스카우트돼 억대 연봉을 받으며 윤택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대표로 막중한 책임을 지지만 제2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매년 2000명에 가까운 경찰공무원이 정년퇴직이나 계급정년에 걸려 조직을 떠나고 있다. 박봉에도 치안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일해 온 이들은 은퇴 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퇴직한 경찰 재취업 현황을 분석한 결과 다양한 입직 경로만큼이나 퇴직 경찰들의 재취업 전선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했다.
고시나 경찰대 출신, 간부후보생들은 근무 중 개인적 흠결이 없으면 총경 이상 간부급으로 승진했다가 퇴직 이후 고액 연봉 스카우트 대상자 명단에 오른다. 퇴직 경찰간부 수요는 대기업 비리사건과도 함수 관계에 있다. 수사단계에서 기업체에 대한 처벌수위 등 정보를 챙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퇴직 경찰의 몸값이 상한가인 이유다.
반면 경정 이하 중·하위급은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생계를 위해 주차요원, 경비원 등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50대인데도 일정 기간 내에 바로 윗계급으로 진급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계급정년제 탓에 조기 퇴직한 경찰들의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중·하위직 퇴직자…생계 위해 일용직 나서
경찰청에 따르면 △2008년 2502명 △2009년 929명 △2010년 2022명 △2011년 1360명 △2012년 2112명 등 최근 5년 동안 8925명이 조직을 떠났다. 연 평균 1785명의 경찰이 재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지만 최근 5년 동안 이른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경찰은 고위급 23명, 중·하위급 99명 등 122명(1.36%)에 불과하다.
중·하위급 퇴직경찰 99명 가운데 51명(51.5%)이 보험사로 자리를 옮겼다. 보험사기 사건이 폭증하면서 수사력을 갖춘 전직 경찰을 앞다퉈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업체별로는 △현대해상화재(17명) △LIG손해보험(8명) △롯데손해보험(6명) △삼성화재해상보험(4명) △동부화재·흥국화재·메리츠화재 해상보험, 그린손해보험(각 3명) △현대하이카자동차보험, 더케이손해보험, 미래에셋생명보험, AIA생명보험(각 1명)으로 옮겼다. 건설업체도 중·하위급 경찰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주임, 노무과장, 현장관리인, 작업반장 등을 맡아 현장에서 충돌이 발생하면 정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경찰 정원의 99.5%가 경정 이하 중·하위급인 점을 감안하면 사기업에 진출하는 이들은 10명 중 2명도 안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퇴직 경찰은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한 지구대에서 근무하던 C경위는 2009년 건축물 관리 업체인 신천개발 경비원으로 재취업했다. 테마파크를 관리하는 삼성에버랜드 일용직으로 들어간 전직 경찰도 3명이나 된다.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는 D경감은 “법조인들은 은퇴 후 변호사를 할 수 있지만 경찰 생활 20년 넘게 해 봤자 퇴직하면 곧바로 추운 겨울”이라며 “남들은 공무원이라 이런저런 혜택을 누리는 줄 알지만 퇴직하는 순간 애들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라고 토로했다. ○20년 경찰 생활에 남은 건 1억2000만원
정년계급 제도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경정은 14년 안에 총경이, 총경은 11년 안에 경무관이, 경무관은 6년 안에 치안감이 못 되면 물러나야 한다. 경위로 임관한 경찰대나 간부후보생 출신, 경정으로 임관하는 고시특채 출신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더라도 총경·경무관 문턱에서 주저앉으면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중반에 경찰을 떠나기도 한다.
경찰대 출신 E경감은 “이 직업을 택했을 때부터 염두에 뒀던 일이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도 “준비 없는 퇴직은 재앙”이라고 불안한 속내를 털어놨다. 퇴직 후 손에 쥐는 목돈도 그리 많지 않다. 20여년 이상 근속한 경찰이 퇴직할 때 손에 쥐는 돈은 계급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1억2000만원이다.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주는 퇴직일시금 6000여만원(연금으로 전환하면 월 200만~250여만원), 경찰공제회에서 매달 월급의 20만~30만원씩 떼어갔다가 소정의 이자를 얹어 돌려주는 6000여만원이 전부다. 서울 시내에 치킨집 하나 내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다.
경찰청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근속기간을 고려하면 다른 공무원들에 비해 적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지방청장·서장 출신, ‘귀한 몸’
반면 고위급 경찰 간부들은 조직을 떠나도 윤택한 생활이 보장된다. 경비업체 에스원은 전직 고위 경찰을 ‘싹쓸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5년 동안 에스원으로 자리를 옮긴 고위급 경찰만 6명이다. 경찰 정원의 0.5%에도 못 미치는 총경 이상 고위급이 매년 1명 이상 에스원에 취업한 셈이다.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치안감)은 감사, 경기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하던 총경은 중부본부고문, 부산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하던 총경과 전 인천 중부경찰서장(총경), 전 경북 청도경찰서장(총경)은 상근고문, 전 경기 평택경찰서장(총경)은 경기본부고문으로 입사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대전지방경찰청장을 역임한 한 치안감은 2009년 퇴직한 지 20일도 안 돼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맡고 있는 삼성물산 상근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개발·재건축 등 관련 민원이 많은 건설업체, 지방경찰청장이 허가·감시·감독권을 행사하는 경비업체는 경찰과의 업무 연관성이 높아 퇴직 공직자 취업이 제한되지만 ‘전관예우’를 노린 ‘경찰 간부 모시기’는 계속되고 있다.
○퇴직경찰, 생계 안전망 없다
퇴직한 경찰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도 허술하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배움터지킴이’, 경찰청이 주관하는 ‘아동안전지킴이’로 일하기도 하지만 월 보수가 30만~60만원 정도인 ‘봉사형 일자리’라 가장의 책임을 다하긴 어렵다.
지난해 9월부터 실시한 한시계약직 제도가 있지만 지난 3월 시범운영 기간이 끝나면서 중단됐다. 일선 경찰서에 일시적인 결원이 생기면 계약직 경찰을 채용해 월 200여만원 이상 지급하던 제도다. 경찰청 차원에서 퇴직 경찰들의 고충을 감안, 지난해 복지정책과 내에 퇴직지원계를 신설하려 했지만 정원이 확보되지 않아 불발됐다. 김종구 경찰청 복지정책담당관은 “퇴직 경찰 지원 대책은 현재 걸음마 단계”라며 “준비 없이 퇴직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관련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전·현직 경찰관 모임인 경우회 관계자도 “요즘은 ‘100세 시대’ 아니냐”며 “경찰 시절 쌓은 노하우를 퇴직과 동시에 잃는다면 국가적인 손실”이라고 말했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