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민예학자 야나기의 심미안 엿볼까

덕수궁관서 25일부터 소장품 139점 소개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조선시대 각형 담배상자.
“어떤 도공이 이 영원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 이와 같은 종교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작품들을 이 세상은 과연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의 ‘그의 조선행’ 중에서)

1920년 5월 서울을 방문한 30대 초반의 젊은 일본인은 청화가 그려진 조선의 평범한 항아리를 보고 전율한다.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자가 된 야나기 무네요시다. 그는 한국미의 진가를 올바로 이해한 지한파 미학자, 한국미를 ‘비애의 미’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문화통치에 협력한 인물 등 엇갈린 평가를 받아왔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 덕수궁관은 25일부터 7월21일까지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열고, 야나기의 공예관이 어떻게 생성됐는지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조명한다. 야나기는 일제강점기 한국미의 특성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본격적인 미학적 탐구대상으로 삼은 사람 중 한명으로 일제의 광화문 파괴를 저지했던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쿄대에서 서양미학을 전공한 야나기는 서양문화를 동경하던 당대 일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윌리엄 블레이크 등 서구 미술가에게 관심을 가졌고 영국인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와도 교유했다. 그러던 그의 서양에 대한 관심을 돌려놓은 것은 1916년의 조선 여행. 이 여행을 통해 민간 공예품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 민예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는 곧 한국민과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했다.

야나기는 명품 중심의 예술사에서 소외됐던 평범한 장인이 만든 불상과 그릇 등에서 미의 극치를 발견하고, 이런 평범한 공예품에 ‘민예’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는 또 물건을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수집하는 행위도 창작행위라고 보고 조선과 중국 일본 등지를 발로 뛰며 각종 민예품을 수집했다. 더 나아가 대중에게 일상적인 물건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움으로써 새로운 예술 창조를 유도하려는 목적 아래 민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예관 설립에도 적극 나섰다. 조선에서 수집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1924년 경복궁 안에 설립한 조선민예관은 그 첫 결실이었다. 이번 전시는 ‘서구 유럽 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 ‘조선과의 만남’ ‘주변에 대한 관심과 민예’ 등 3부로 구성해 야나가의 관심이 서양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주변국으로 확산돼나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출품작은 도쿄 일본민예관 소장품 및 관계자료 139점으로 이뤄졌다. 야나기에게 서구미술을 가르쳐 준 버나드 리치의 ‘숲속의 호랑이’ 도자기판, 모쿠지키 쇼닌의 ‘허공장보살상’, 조선시대 ‘철사운죽문항아리’와 ‘담배상자’ 등이 선보이고 그가 직접 만든 공예품도 만날 수 있다.

류지연 덕수궁관 학예연구사는 “야나기 미학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시”라며 “그동안 일제 문화통치의 조력자로 알려진 야나기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