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CCTV에 걸음걸이만 찍혔는데…"범인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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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 끝없이 진화…걷는 모습 분석해 용의자 키·나이·질병경력 파악지난 24일 대구시 지산동 대구지방경찰청 대강당. 전국 과학수사 요원 400여명이 모인 제11회 과학수사 국제학술세미나에 중년 외국인 남성이 강단에 올랐다. 영국 런던메디컬센터(LMC) 족병학과 의사이자 족부의학수술칼리지 선임연구원인 헤이든 켈리 박사였다. 켈리 박사는 2000년 자신이 개발한 ‘걸음걸이 기법(gait analysis)’을 소개하려고 한국을 찾았다. 강단 위에 마련한 화면에 폐쇄회로TV(CCTV) 화면 6개가 나타났다. 국내에서 최근 발생한 절도 사건 용의자 관련 CCTV였다. 첫 화면에는 범행 현장이 포착됐지만 얼굴은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화면에는 용의자로 지목된 남성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담겼다. 용의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둘 다 한쪽 다리가 옆으로 벌어진 채 걷고 있었다. 무릎이 바깥으로 약간 휘었거나 인대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켈리 박사의 의견이었다. 그동안 범인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거나 범행 현장을 확인하는 용도로 활용하던 CCTV를 보다 정교하게 재해석한 것이다.
팔·목·허리 움직임 파악…법정 증거로 활용할 수도
체취로 실종자·시신 수색…경찰 '체취견'도 맹활약
90분안에 16개 염색체 분석…이동식 DNA 감정기도 등장
영국에서는 켈리 박사 외에 걸음걸이 기법 전문가 2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3월 걸음걸이 기법에 대한 켈리 박사의 진술이 법정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 외에도 이동식 DNA감정기 등 최신 과학수사 장비가 다수 소개됐다.
경찰의 과학수사 기법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지능·흉포화되는 강력범죄에 대처하고 법정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10여년 전 발생한 미제 사건을 쪽지문이나 혈흔, DNA로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걸음걸이 분석 기법, 발자국이나 타이어 자국으로 피의자를 특정하는 족·윤적 기법, 체취견을 이용한 기법 등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팔자걸음 0.2%뿐”
강서 버스차고지 방화 사건은 걸음걸이 기법을 적용해 해결한 사건은 아니지만 해당 기법의 가능성을 엿보게 해 준 대표적인 사례다. 1월15일 오전 3시께 서울 외발산동 영인운수 버스차고지에서 난 화재로 시내버스 38대, 승용차 2대, 건물 등이 불에 타 25억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냈다. 경찰은 화재 발생 직후 차고지를 빠져나오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이 회사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다 해고된 황모씨(46)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CCTV에는 용의자의 얼굴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황씨의 옛 직장 동료들은 “걸음걸이를 보니 황씨 같다”고 입을 모았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황씨는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4월11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용석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과학수사계장은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지인들에게 확인해 범행을 입증하는 방식은 구시대적인 기법”이라며 “용의자를 모르는 사람이 걸음걸이 등을 분석·판정해야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경찰청이 걸음걸이 기법을 도입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분석해 건강 상태는 물론 나이, 키, 몸무게, 걷는 속도 등을 특정해야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최 계장은 “걸을 때 양다리의 각도가 30도 이상 벌어지는 팔자걸음은 전체 인구의 0.2%에 불과하다”며 “관절에 병적인 문제가 있는지 수술 전력이 있는지 안짱다리인지 등을 유추해 걸음걸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CCTV로 해결하는 사건이 전체 사건의 70% 정도인 만큼 걸음걸이 기법을 도입하면 수사력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감정하는 CCTV는 연평균 5000건 이상이다. 경찰청은 국내 정형외과 의료진과 접촉해 ‘한국의 헤이든 켈리’를 찾아 외부 자문위원으로 영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700만원짜리 ‘체취견’ 실종자·시신 수색 경찰은 체취를 이용해 시신·실종자 수색에 나서는 체취견도 두 달 동안 시범 운영한 뒤 지난해 11월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군견처럼 단순히 수색만 하는 게 아니라 법정 증거로 채택되도록 냄새의 이·화학적 특성을 분류해 체취 증거 DB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일본에서는 체취 증거가 법정 증거로 인정되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에는 인간체취견팀이 따로 있다는 점을 참고했다. 현재 서울·부산·대구·광주·제주·인천·대전지방경찰청에 1마리씩 모두 7마리가 있다. 서울청에 있는 마약탐지견까지 합치면 모두 8마리다.
체취견은 ‘핸들러(지도수)’를 한 명씩 배정해 훈련한다. 지난해 9월 납치상해 사건을 벌인 뒤 경북 영덕으로 도주하다 자살한 용의자의 시신, 지난해 10월 경북 청송에서 실족한 80대 노인의 시신도 체취견이 찾아냈다.
최근에는 수원 칠보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50대 택시기사 이모씨의 시신도 발견했다. 경찰은 부인과 다툰 뒤 집을 나간 이씨가 돌아오지 않자 평소 “칠보산에 가서 죽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가족들의 진술을 토대로 칠보산 주변 CCTV를 통해 이씨가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찾아냈다. 당초 지난 7일부터 보름 동안 100여명을 투입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22일 오후 2시 투입된 서울청 체취견 ‘나로’는 2시간40분 만에 등산로에서 100~120m 떨어진 곳에서 목을 매 숨져 있는 이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과학계 송성준 경위는 “가격은 700만원 정도인데 1~2년 훈련해야 한다”며 “올해와 내년에 3마리씩 추가 구매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대당 3억~4억원…이동식 DNA감정기 구입
대구청 세미나에서는 미국 인터젠스사의 이동식 DNA감정기(Rapid HITT)도 소개됐다. 90분 안에 16개 염색체를 분석하는 장비다. DNA 분석은 국과수에 맡기면 보통은 15일, 긴급 감정을 의뢰해도 24시간이 걸린다.
경찰청은 내년에 예산을 확보해 이 장비를 구입할 계획이다. 대당 가격은 3억~4억원, DNA 시료값은 감정 회당 50만~60만원 수준이다. 현재 국과수에서 사용하는 시료는 회당 5만3000원 정도다.
올해 경찰청 예산 8조3000억원 가운데 과학수사 예산은 182억원(0.2%). 전국 250개 경찰서로 나누면 경찰서 한 곳당 월 평균 600여만원을 배정받는 셈이다. 적지 않은 예산이지만 과학수사 장비는 대부분 몇 억원을 호가하는 고가여서 일선에서는 빡빡하게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해외 우수 장비를 들여오거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자체 기술로 연구개발에 나서는 게 급선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수사기관에는 연구개발 기능이 존재하지 않아 외국처럼 걸음걸이 기법 등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외국처럼 연구기관과 관공서가 업무 협조를 해 대학 교수가 경찰에 파견 근무를 하는 식으로 인력 호환이 되도록 경찰이 ‘젊은 기술’을 아웃소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