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게 아닌데', 코끼리 탈출사건 보는 세가지 시선

Review

윤상화 조련사 연기 압권
'코끼리 2인무'도 인상적
“누구나 다 그래. 다 자기만의 왕국에서 살아. 이제 모두 다 코끼리가 될 거야. 이 세상은 코끼리 왕국이 될 거야.”

경찰서 취조실에서 한 시간 남짓 시달리던 조련사(윤상화)는 더 이상의 항변을 포기한 채 코끼리로 변신한다. 변신하기 전 그를 괴롭히던 정신과 의사(유성주)와 형사(유재명), 엄마(문경희)의 얘기를 돌아가며 들어준다. 수십 번은 되풀이했을 “그게 아닌데…”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조련사는 대공원을 탈출해 시내를 뒤집어 놓은 코끼리 다섯 마리 중 ‘삼코’(강승민)를 불러내고는 함께 코끼리 춤을 춘다.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그게 아닌데’의 마지막 장면이다. 무대는 어두워지고 연극은 끝났지만 조련사와 삼코가 더없이 처연하게 추던 ‘코끼리 2인무’의 잔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무대는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만 놓인 취조실. 코끼리들을 일부러 풀어줬다는 혐의로 끌려온 조련사를 보는 의사와 형사, 엄마의 시각은 제각각이다. 의사는 ‘코끼리를 너무나 사랑한 성도착자’로, 형사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린 하수인’으로, 엄마는 ‘모든 속박과 구속을 풀어주는 천사’로 바라본다. 조련사가 “그게 아닌데, 비둘기가 날아가자 거위가 꽥꽥거려서 코끼리가 놀라 뛰어간 건데”라고 해도 ‘자기만의 왕국’에서 사는 이들의 울타리는 더욱 높아질 뿐이다. 극은 소통이 단절되고 욕망이 뒤틀린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우화적으로 드러내고 통렬하게 풍자한다.

연극은 단 한 번의 세트 이동이나 암전 없이 처음과 끝이 한 호흡으로 끝나는 단막극이다. 극의 시간과 실제 시간이 60여분으로 같다. 그런데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배우와 연출의 힘이다.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들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호흡과 속도 조절로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들의 ‘연기 앙상블’은 황홀한 기분이 들 정도다. 윤상화의 연기는 압권이다. 전작인 ‘칼집 속에 아버지’에서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뽐냈던 그는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어눌하고 모자란 듯한 조련사의 성격과 심리변화를 담아낸다. 연극팬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한두 시간을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소극장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배우들과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다. 지난해 9월 초연돼 작년 말 주요 연극상에서 작품·연출·연기상을 휩쓴 작품이다. 23일까지, 2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