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통행세? '차단세'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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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윤 중소기업부장 hyunsy@hankyung.com국회 정무위원회가 최근 통과시킨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새 조항이 신설됐다. 통행세 규제다. ‘다른 사업자와 거래하면 상당히 유리’한데도 ‘거래상 실질적인 역할’이 없는 대기업 특수관계인 등과 거래해 이득을 챙기면 과징금을 부과(공정거래법 개정안 23조1항7호)하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소 협력업체와 거래하면 싼 가격에 계약할 수 있는데도 대기업 총수나 친인척이 관련된 계열사를 중간에 끼어 넣어 ‘수수료’를 챙기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 돈(수수료)은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들이 강압적으로 걷는 통행세와 비슷하다고 해서 정치권과 공정거래위원회는 ‘통행세 규제’라 부른다. 국회 정무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대기업 계열사들이 별다른 역할 없이 이익만 챙기고 △폐쇄적인 (대기업) 내부거래 시장을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내부거래 물량에 안주하는 대기업 계열사들의 경쟁력 약화마저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정위의 잘못된 현실 인식
국회가 통행세 규제를 만든 데에는 공정위가 지난해 발표한 실태조사도 한몫을 했다. 대기업 소속 20개 광고·시스템통합(SI)·물류업체 매출의 71%가 ‘계열사 간 내부거래’였고, 계열사 간 거래의 대부분(88%)이 ‘수의계약’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대기업들이 내부거래와 수의계약을 많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회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커지면 처리해야 할 일과 거래처가 늘어난다. 사업 부문을 쪼갤 필요성이 생긴다.
광고나 전산 물류 등 회사 내에서 하던 일을 떼어내 별도법인으로 만들면 모회사에서 하던 일 말고도 밖에서 새로운 일감을 따올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사업다각화를 이룰 수 있다. 이 밖에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고 △모기업과 다른 임금 및 고용 체계를 만들 수 있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고 △사업부문별 책임경영을 강화할 수 있다.
‘계열사 매출액의 71%를 내부거래로 채워 넣고 있다’는 공정위 주장은 현실을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모기업에서 주는 일만 하던 계열사들이 이제는 일감의 29%를 바깥에서 수주’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그 비중이 아직 30%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이다. 중소기업 일감 줄어들 수도
대기업 계열사가 거래 과정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시장경제에서 ‘역할’이란 재무제표에 나타낼 수 있는 일만 있는 게 아니다. 모기업이 수많은 거래업체들과 일일이 계약하면서 떠안아야 했던 각종 위험을 대신 책임지는 것에 대해서도 수수료를 받아야 한다. ‘자신이 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기회이익)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수수료일 수도 있다.
모기업과 거래하는 가격과 똑같은 금액으로 중소기업에 일을 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위험 부담을 다 떠안고 기회이익도 포기하라’는 압박이다. 누가 일감을 중소기업에 주려고 하겠는가. 차라리 자기들이 직접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기업 계열사가 중소기업에 일감을 주면서 챙기는 수수료를 ‘통행세’라 부르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폐지되면 더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몰리겠지만, 대기업 계열사들이 받는 수수료가 없어지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통행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통행세’가 아니라 ‘거래 차단세’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
현승윤 중소기업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