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에로티시즘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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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나는 말하고 쓰는 일에 재주가 없다. 나에게 자서전 따위를 기대하지 마라. 나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될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최고 인기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 언론 인터뷰를 한 차례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을 통해서만 그의 내면을 표현했다. 그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은 2011년 1억3500만달러(약 1511억원)에 팔려 화제가 됐다.
클림트는 1862년 7월14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 아버지는 귀금속 세공사였다. 14세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을 앞두고 맡은 빈 역사박물관의 장식으로 빈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888년 완성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으로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 화단의 ‘젊은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30세 때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3년 만에 화폭 앞에 돌아와 보수적 미술단체를 비판하며 ‘빈 분리파’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았다. 화려한 금 장식, 다양한 색채로 에로틱한 그림을 주로 그렸던 클림트는 빈 대학의 천장 그림 ‘철학’ ‘법학’ 등이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자 화단을 떠났다. 홀로 작업실에 파묻혔던 시간은 천재화가에겐 축복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키스’ ‘다나에’ 등이 이때 탄생했다.
결혼하지 않고 그의 그림 모델이 된 여인들과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었던 그가 1918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유산을 둘러싸고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도 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