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香·萬·里

200년 화맥 잇는 운림산방의 4대가
허련·허형·허건·허문 한경서 특별전

< 墨·香·萬·里 : 묵향만리 >
한경갤러리의 여름 기획전 ‘운림산방 4대가전’에 전시된 남농 허건의 1976년작 ‘원포기범(遠浦歸帆)’.
추사 김정희와 학승 초의선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1808~1893)은 조선 남종화(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뜻을 그리는 수묵화)의 마지막 계승자로 불린다. 추사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고 극찬할 정도로 시서화에 통달한 소치는 조선 헌종 앞에서 직접 어연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려 바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1856년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뜨자 고향 진도로 낙향해 운림산방을 짓고 화업에 전념했다.

중국 남종화의 한국적 수용과 확산에 기여한 소치를 비롯해 그 화업을 이은 아들 미산 허형(1862~1938)과 손자 남농 허건(1908~1987), 증손자 임전 허문(1941~) 등 허씨 가문 4대가의 작품 20여점을 모은 특별전이 22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펼쳐진다. ‘묵향만리(墨香萬里·묵의 향기가 만리를 간다), 운림산방 4대가’를 주제로 한 이 전시회는 소치에서 시작된 200여년간의 허씨 가문 예술세계를 통해 국내 화단에서 차지하는 운림산방 화맥의 역사적 성격과 미래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다.

소치 허련의 ‘석모란’.
소치의 작품은 7점이 걸린다. 소치는 ‘허모란(許牡丹)’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모란에 집착하며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소치의 ‘석모란’은 아담하면서도 풍성한 모란의 모습으로 능란하고 생기 넘치는 운필감이 느껴진다. 부채꼴 모형의 실경산수화 ‘운림필의(雲林筆意)’도 관람객을 반긴다. 진도 인근 외딴섬의 원경, 중경, 근경을 활달한 필선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나지막한 둔덕과 하늘하늘 내려앉은 나무들이 대조를 이루며 화면의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내고 격조를 더해준다. 1940년대 금강산만 열두 번 올랐다는 남농의 실경산수화는 12점이 나온다. 1970년대 그린 ‘추경’은 가을이 내려앉은 강변의 풍경과 소나무, 갈대를 그린 작품. 아름다운 남도의 가을빛이 남농의 붓에 의해 살아났다. 1976년 작품 ‘원포귀범(遠浦歸帆)’은 호탕한 선과 잔 붓질로 강변의 배를 표현해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쌍솔’은 남도의 기상과 정신세계를 소나무에 녹여내 남도에 대한 남농의 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운무 산수화에 뛰어난 임전은 현대화풍의 산수화 5점을 내보인다. 움직이는 안개,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안개, 산야를 파고 드는 안개, 뇌성벽력이 치면서 몰려드는 구름 등 한국의 산하를 운무로 단순화한 작품들이다. 그의 근작 ‘비상’은 안개 낀 강물을 따라 유유히 떠가는 배에 앉아 있던 제비가 구름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되살려냈다.

한경갤러리 측은 “지금까지 실제보다 평가절하돼 온 소치 가문의 예술세계를 호남을 넘어 한국미술이라는 지평에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360-411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