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고조선부터 현대까지…맞수들이 펼치는 '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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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복거일의 가상 역사 대담▷기준=원주민의 정착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질적 집단으로 바라보는 역사 기술이 많습니다. 기자(기씨조선 시조)와 위만 공에 대한 주장들이 대표적이지요. … 종족이나 문화는 뒤섞이면서 진화하고 내 것, 남의 것을 가르는 일은 부질없다는 태도가 널리 퍼져야 합니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
복거일 지음 │ 다사헌 │ 424쪽 │ 1만8000원
▷위만=혈통을 따져 과거 조선 땅에 들어와 살면서 한민족 성립에 유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여기는 태도는 이치에 어긋나고 해롭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역사 교과서들은 그런 태도에 바탕을 두고 쓰였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거든요.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 기준과 그를 내쫓고 위만조선을 창건한 위만이 현재로 소환돼 대담을 벌인다. 당시 역사적 배경과 사회 상황을 폭넓고 깊이 있게 설명한 뒤 기씨·위만조선을 이질적 집단으로 폄하하는 역사적 기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한다.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의 신작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고조선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세력을 대변하는 22쌍의 맞수들이 등장한다. 계백과 김유신, 정도전과 이방원, 인현왕후와 장희빈, 대원군과 명성황후 등 대표적 라이벌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6·25 전쟁 때 미국·중국 양 진영의 군 지휘관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등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총출동한다. 저자는 ‘가상 대담’이라는 흥미로운 형식으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한국사를 통찰하고, 이들의 입을 빌려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관점은 역사 교과서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단일민족 신화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왔다며 과거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준과 위만’ 대담에서 단군왕검으로 시작되는 역사 연대기와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고, ‘왕조와 왕준’ 대담에서는 3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 정권으로 융성했음에도 기존 교과서가 간과하거나 축소한 낙랑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한반도에서 유독 오래 존속했던 노예제도에 대해 최충헌의 노비로 ‘만적의 난’을 일으킨 만적을 통해 강하게 비판한다. 만적은 “천년 넘게 이어진 그 지독한 노예제도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발전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식인이 나오지 않았다”며 통탄한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 정신’이란 화두를 던진다. 그는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성찰해야 한다”며 “세계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혈연 위주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경계하고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이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하려는 포용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