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에 춤추는 정치권 '고무줄' 잣대…5500만? 8800만원?정부도 '오락가락'
입력
수정
지면A5
커버 스토리 - 2013 한국 중산층은 누구인가‘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 되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집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야, 중간 소득층 '내편 만들기' 경쟁
야당 "중산층 부풀려졌다" 며 중산층 경계선 4200만원 주장도
중산층 키우자면서 기준조차 없어
고소득자-중산층 소득격차 커져 중산층 귀속 의식 약해져
사전에 나오는 중산층(中産層)의 정의다. 포털사이트에서 지난 한 달간 ‘중산층’이란 말을 포함한 기사를 검색하면 4400여건의 글이 쏟아진다. 모두가 중산층에 대해 말하는 시대다. 하지만 누가 중산층이냐고 물으면 답할 사람이 없다. ‘2013년 세법개정안’ 후폭풍은 이 모호함에서 시작됐다. ○정부는 ‘깜깜이’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가구 중위소득 50~150%를 중산층으로 본다. 전체 가구를 소득 크기로 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가구 소득(중위소득)을 100%로 두고, 위아래로 50%씩을 더하는 것이다. 정부의 2013년 세법개정안은 이 같은 방식으로 총급여 5500만원까지를 중산층 상위 경계선으로 봤다. 1년 전 세법개정안에서 제시한 숫자와 동일한 것이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2011년 5인 이상 사업장 상용근로자 평균임금 3624만원의 150%까지를 계산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평균임금 규모가 크게 바뀌지 않아 굳이 숫자를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2008년 소득세 인하방안을 내놓으면서 중산층 경계선을 과세표준 8800만원(연봉 약 1억2000만원)까지로 잡았다. 감세혜택이 중산층·서민에게 돌아간다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계산법에도 허점이 많다. 5인 이상 사업장의 상용근로자만 대상으로 삼다 보니 영세사업장 종사자나 일용직, 자영업자 등은 누락된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선진국과 비교해 자영업 종사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며 “소득 노출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다 보니 통계적으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집계하는 중위소득은 가구 기준이라 납세자에 적용하기 어렵다. 정부가 중위소득 대신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이 때문인데 평균값은 중위값보다 대체로 크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고무줄’ 기준정치권 역시 논란을 키우기만 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윤호중 민주당 의원은 “정부의 중산층 기준 5500만원은 매우 부풀려져 있다”며 “일용직 등을 포함한 실제 중산층 경계선은 4200만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잣대로 보면 급여 4000만원대 초과 근로자는 고소득자에 속한다. 고소득자 세 부담을 주장하는 야당 주장대로라면 세금을 오히려 더 걷어야 한다. 정부의 5500만원 기준이 ‘중산층 세금폭탄’을 불러왔다는 지금 야당 주장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이 같은 양상은 여야가 경쟁적으로 중간 소득층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중산층 기준을 임의로 설정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국민들은 ‘복지는 좋고 세금은 싫다’며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하기 쉽다”며 “문제는 정치권이 이를 부추기면서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이참에 중산층 기준을 명확히 하고 넘어갈 것을 주장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통계청의 중위소득 기준을 가구원 수에 따라 균등화하면 좀 더 정확한 통계가 나올 것”이라며 “하지만 조사대상이 7000여 가구에 불과한 데다 자칫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 손을 못 대고 있다”고 토로했다. 중산층 70%를 국정기조로 내건 정부가 정작 지표 관리에는 소극적인 셈이다.
○중산층 박탈감에 주목해야
근본적인 문제는 지표 바깥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의 ‘자기 부정’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상태로는 지표상 ‘중산층 70%’를 달성해도 국민이 인정 안 할 가능성이 높다”며 “약해진 중산층 귀속의식을 높이는 것이 더 큰 과제”라고 말했다.
1980년대까지는 국민 70~80%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자신을 저소득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외환위기 이전엔 소득이 많지 않아도 성장기의 풍요로움 속에서 ‘나도 언젠가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중산층 심리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산층의 박탈감은 일부 전문직종과 근로자의 소득격차가 커진 데 따른 것이란 분석도 있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한국의 중산층은 예전 같은 교육 투자로 안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없다며 불안해한다”며 “이 때문에 교육비 지출이 늘고 생활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중산층을 왜 늘려야 하는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중산층의 책임 수준은 어디까지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유미/고은이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