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신용평가회사가 '을'인 이유

하헌형 증권부 기자 hhh@hankyung.com
지난 19일 국내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하나인 한국기업평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신용평가사, 소통을 소망한다’는 글이 업계에서 화제다. 신용평가 기준 도입 실무를 맡고 있는 경력 21년차의 애널리스트인 마재열 평가기준실장이 쓴 글이다.

그는 A4 용지 6장 분량의 글에서 작심한 듯 채권 발행 기업들의 ‘등급 쇼핑’ 관행에 비판을 쏟아냈다. 등급 쇼핑이란 채권 발행사들이 신용평가사들 중 높은 신용 등급을 줄 것으로 보이는 곳에 신용평가를 맡기는 식으로, 신용 등급을 ‘고르는’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흔히 신용평가사를 ‘갑(甲)’으로, 발행사를 ‘을(乙)’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정반대다”고 글을 시작한 마 실장은 “발행사가 (신용평가사 선정 때) 신용등급을 관대하게 평가하는 곳만 선택하고 엄격한 곳엔 평가를 의뢰하지 않아, 평가사들은 피(被)평가 업체의 위험 요인을 보고서에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한다”고 주장했다. 신용평가사 직원이 ‘고객’인 기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의 비판은 국내 신용평가 시장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채권 발행 기업은 국내 신용평가 3사(한기평·NICE신용평가·한국신용평가) 중 2곳 이상으로부터 신용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원하는 신용등급을 주지 않거나 신용등급을 내렸다는 이유로 다시 평가를 맡기려 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가고 있다. 마 실장은 “평가사들이 선정 배제를 피하려고 하다 보니, 한 평가사가 ‘총대’를 메고 평가대상 업체의 등급을 내리면 그제야 등급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고 털어놨다. 신용평가사는 신용평가와 평가 수수료 수입 간의 이해 상충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의 눈치만 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채권 발행 기업들의 등급 쇼핑 문제가 ‘고질병’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해당 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들이 높은 신용등급을 받으려고 하는 건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평가를 골라받으려는 행태는 ‘신용위험 정보 제공’이라는 신용평가사 본연의 기능을 무디게 하고, 투자자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하헌형 증권부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