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1병영] 권진봉 한국감정원장 "이불 속에서 건빵 세 봉지 밤새 녹여먹던 기억 생생"

나의 병영 이야기

1973년 1월 해병대 257기로 입대…포항서 6개월·목포서 2년간 복무
"해병대서 배운 건 위기극복 의지"
1973년 1월 해병대 257기로 입대했다. 사회적으로 워낙 혼란했던 시기여서 일찍 군대에 다녀오려고 마음 먹었다. 육군은 대학 3학년 이상이 돼야 입대할 수 있었고 지원 가능한 곳은 공군, 해군, 해병대 정도였다. ‘남자로 태어났으니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가보자’는 마음에 해병대에 지원했다.

처음부터 난항의 연속이었다. 전반기 기초 훈련은 8주일이었다. 입대 시기가 겨울이어서 더욱 힘들었다. 나는 훈련 중 발등에 동상이 걸려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진 뒤 다시 교육을 받았다. 밥 먹는 것도 훈련이었다. 1분 내 식사를 마치라는 명령에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숟가락질 몇 번 만에 식사 시간 종료 명령이 떨어지니 하루 세끼를 먹어도 소화할 것이 없었다.
1974년 11월 목포 3해역사 복무 당시 권진봉 상병 (왼쪽).
훈련 막바지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파 몰래 PX(군대 내 매점)에서 건빵 세 봉지를 샀다. 취침 점호 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몰래 건빵을 먹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건빵 씹는 소리가 옆 전우에게 들릴까 봐 하나하나 녹여 먹었다. 한 개 먹는 데도 오랜 시간이걸렸지만 그 달콤한 맛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열심히 먹고 있는데 “기상 5분 전!”이라는 외침이 들렸다. 밤이 새도록 건빵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흘러 전반기 기초 군사 훈련이 모두 끝났고, 자대 배치 시기가 됐다. 당시엔 군대에 대학생 출신이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서울대 농공학)을 다니던 중 입대했기 때문에 내심 ‘좋은 보직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다. 행정병을 맡고 싶었지만 악필 때문에 뽑히지 못했다. 결국 보병으로 배치받아 포항사단 5연대에서 6개월을 지냈고, 이후 목포 3해역사에서 2년을 보냈다. 해병대에서는 조교와 선임들의 ‘안 되면 되게 하라’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외침을 수도 없이 듣는다. 해병대생활을 마치고 나니 나 역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가득 찼다.

군복무를 마치고 국가를 위해 할 일을 찾던 중 기술고시를 준비했고 이후 공무원(기시 13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직에서도 군생활에서 얻은 강한 의지는 큰 힘이 됐다.

1997년 건설부 건설안전과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서울지하철 7호선 침수로 운영 중인 지하철이 1주일간 중지되는 사고가 났다. 담당 부서에서 신속히 대응팀을 마련해 사고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심각하니 담당자조차 선뜻 나서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그렇게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해결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몇 개월간 밤낮 사방팔방으로 뛴 끝에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병대 시절 체득한 강한 해병정신이 없었다면 위기 극복 의지를 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2011년 한국감정원장으로 부임한 뒤 가장 먼저 재정상태를 파악했다. 당시 수익이 적었고 이대로는 연말 적자가 뻔했다. 그럼에도 노조와 많은 구성원들은 후생복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완장(원장직책)을 떼고 인생 선후배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며 마음을 열었다. 점차 구성원들도 공감하기 시작했고 이른 시일 안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입사를 위해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것이 안타깝다. 스펙을쌓느라 고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목표를 잡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과거에 미련을 두지 말고,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목표를 토대로 오늘을 열심히 살길 바란다.

그러면 어떤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생긴다. ‘위기를 극복할 수있는 힘’, 그것이 내가 해병대에서 배운 정신이다.

권진봉 한국감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