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호텔·△△기업엔 출자 말라"…노조 압박에 투자 접는 연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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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켓인사이트 9월10일 오전 6시22분
기업·부동산 투자 늘리자…노동·시민단체 '집중 공격'
투자 위축 수익률 떨어져…결국 가입자만 손해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지난달 19일 한국노총으로부터 공문 한 장을 받았다.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 인수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이지스자산운용에 투자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교직원공제회 관계자는 “검토 결과 실익이 크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는데 노조 측 의사를 전달받고 투자를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한국노총은 교직원공제회를 포함해 총 9곳의 연기금에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확인됐다.
비슷한 시기 김동만 한국노총 부위원장은 이찬우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스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얻어냈다. 김 부위원장은 11명으로 이뤄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회 멤버다. 전국 노조 단위의 상급단체가 연기금에 직접 투자 재고를 요청하는 일은 과거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연기금, 보험사 등 국내 ‘큰손’들이 저금리 시대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업, 부동산 등 비(非)전통적 대상에 투자를 늘리면서 노동계 시민단체 정치권 등 이해 관계자들의 엉뚱한 ‘표적’이 되고 있다. 개별 투자건마다 외부 실력 행사와 압박이 쏟아진다. 투자업계에서는 연기금들이 경제 논리보다 집단 이기주의를 의식한 나머지 합리적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투자 위축으로 중장기 수익률이 떨어지면 연기금 가입자들이 결국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노총 산하 르네상스호텔 노조는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호텔 매각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이지스가 호텔을 인수한 뒤 수익 제고를 위해 오피스(사무용) 빌딩, 호텔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노조에 통보했다”며 “700여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은 이미 시민단체, 노조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지난달 26일 MBK파트너스가 ING생명 인수 본계약을 체결한 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실로부터 서면 질의서를 받았다. ING생명 투자 여부와 이유를 밝히라는 내용이었다. MBK의 ING생명 인수를 반대하는 ING생명 노조 측이 국회의원을 집중적으로 설득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본격적인 실무 검토를 하기 전에 ING생명 투자를 포기했다.'의결권 강화' 국민연금에 간섭 더 세질 듯
◆노동계, 정치권 타깃 연기금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있는 서울 논현동 강남회관은 각종 집회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막상 집회 사유를 들어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권한을 벗어난 요구가 많다. 올해 초 신세계그룹 이마트가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직원들을 불법 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참여연대, 민주노총,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구성한 ‘국민연금 바로세우기 국민행동’과 ‘이마트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노동자를 탄압하는 이마트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국민연금이 이마트 주식 62만주(2.24%)를 갖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국내 우량 상장사 주식을 대부분 들고 있는데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주식을 사고팔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항변했다.
지난해에는 국민연금 본사 앞에서 서울 동대문 지역 상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출자한 사모펀드(PEF)가 동대문 상가에 투자해 지역 상인들과 마찰을 빚은 게 빌미가 됐다. 국민연금은 “위탁 운용사의 개별 투자 건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논란거리 될까’ 투자 위축
연기금들은 이런 압박이 투자 결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토로했다. 한라공조 노조는 지난해 7월 국민연금에 “(한라공조의 대주주인) 비스티온 측 공개매수에 응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강남회관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결국 국민연금이 공개매수에 응하지 않으면서 비스티온의 상장폐지 계획이 무산됐다. 전직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미래 수익률만 보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대상에 투자를 강행한 경우 감사원 국회 등으로부터 두고두고 감시를 받는다”며 “한두 번 시달리다 보면 그런 투자는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국민연금의 주주권, 의결권이 강해지면 이해 관계자들의 특정 투자에 대한 간섭과 반발이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기금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환경, 사회, 지배구조(ESG) 등에 대한 국민연금의 책임 투자를 강조하는 여론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현행 의결권 행사 규정처럼 투자 대상에 대한 공개된 가이드라인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좌동욱/고경봉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