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통상임금, 서울대-고대파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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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설 노동전문기자·좋은일터연구소장 upyks@hankyung.com통상임금 범위를 놓고 노사가 다투고 있는 갑을오토텍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 공개변론이 열렸을 때 단연 눈길을 끈 대목은 노사 양측의 참고인으로 참석한 김홍영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노동계 측)와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사용자 측) 간의 변론 대결이었다. 대법관들의 송곳질문으로 변호인들의 진땀을 흘리게 한 대목도 스포츠보다 훨씬 재미없는 통상임금 공개변론의 생중계를 지켜보도록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지만 중계를 보도록 눈길을 잡아놓은 진짜 요인은 진보와 보수의 대표주자로 나선 두 참고인의 대결이었다.
노동인권 대 단체협약 인정 서울대 법대 출신인 김 교수의 진보성향과 고려대 법대 출신인 박 교수의 보수성향 간 대결은 두 대학의 명예까지 걸리면서 관전자들의 관심을 배가시켰다. 김 교수는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박 교수는 “노사가 합의한 통상임금 인정” 등을 주장했지만 누가 대법관들을 더 설득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 통상임금문제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토종의 ‘서울학파’와 고려대 법대 출신으로 독일에서 공부한 ‘고려학파’ 간 대결로 진행되는 양상이다. 서울대 법대와 고려대 법대 출신의 노동법학계와 법조계 진출자 숫자는 70~75% 대 25~30% 정도 비율로 서울대 법대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서울학파와 고려학파를 1 대 1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노동인권과 노동법리를 중시하는 서울학파는 민주화운동 초기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주장해왔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반면 노사자치주의를 인정하는 독일 제도를 벤치마킹한 고려학파의 접근법은 노동인권이 어느 정도 해결된 현 시점에선 합리적이라는 평가다. 때문에 양대 학파를 비슷한 세력으로 비교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해석이다.
서울학파는 학자와 판사, 변호사를 중심으로 1988년 서울대 노동법연구회를 만들어 진보적 성향의 여러 정책들을 제안했다. 연구회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교수 또는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로 구성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보성향의 모임이 됐다. 노동법리만 중시는 월권
130여명 정도인 연구회 멤버들은 한국 노동법 개정과 노동관련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서울학파에는 서울대 법대 교수를 거친 김유성 세명대 총장을 필두로 이흥재 이철수 서울대 법대 교수 등이 있다. 또 정인섭(숭실대), 조용만(건국대), 강성태(한양대) 교수도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국내파다. 학자들은 30~40여명이 참여하고 나머지는 판사, 변호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학파는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서 박사를 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김형배 고려대 명예교수, 하경효 박종희 박지순 고려대 교수 등이 모두 독일박사다. 김영문 전북대 교수와 권혁 부산대 교수도 고려학파다. 고려대 법대 출신 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노동법이론실무학회에는 고려대 출신 학자, 변호사, 노무사 등 100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독일에선 민법과 계약법을 중시하는 만큼 독일 유학파들도 단협을 중시한다. 이들은 한국의 노사가 20~30년 동안 자율적으로 맺어온 단체협약도 당연히 유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상임금 문제에 대해 대법관들이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노동법의 법리만을 중시하는 판결은 어쩌면 사법부의 월권일 수 있다. 합리적 판결을 기대해본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좋은일터연구소장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