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그릇도 백자처럼 예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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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6
사진작가 노세환 씨 자하미술관서 개인전가을 햇살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서울 부암동 자하미술관 전시장. 평범하고 하얀 짜장면 그릇이 사진가의 영혼을 타고 고고한 백자처럼 날아든다. 사진가가 기다리던 햇살이 환하게 웃음을 띠는 순간, 그릇들도 하얀 옷을 입고 활짝 웃는다. 사진작가 노세환 씨(36)의 작품 ‘자장면집 백자’ 시리즈는 이렇게 그릇과 백자의 유쾌한 이중성을 선사한다.
식기에 흰색 칠한 뒤 촬영한 30여점 선봬
오는 29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노씨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익숙한 짜장면집 그릇을 백자처럼 담백하고 고결한 명품으로 재구성했다”며 “천(天)과 인(人)의 미학을 구현한 조선시대 도자기와 음식 그릇에 담긴 식(食)의 미학을 동시에 포착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희대와 런던 스레이드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노씨는 그동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속도감 있게 도심과 시골의 일상을 담아온 작가다. ‘소나무 작가’ 배병우 씨에게 사진을 배운 그는 중앙미술대전 작가상, 송은미술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자장면집 백자’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거리 풍경 사진에서 벗어나 짜장면 그릇 같은 소품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후 촬영한 근작 30여점을 걸었다. 전위적인 사진이 넘치는 시대에 반발하듯 은유의 본질에 충실한 함축적이고 정제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노씨는 “움직이는 사물의 정지된 장면을 포착하는 여느 사진과 달리 고정관념을 깨는 데 카메라 렌즈를 활용한다”며 “유년시절 누구나 추억을 간직한 짜장면 그릇에 조선시대 백자의 은은한 미감을 이입했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고정관념을 카메라 기법으로 건드리면 직설적 묘사 없이도 관객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인간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보이고 싶은 거죠.”
노씨가 짜장면집 그릇을 예술로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5060세대에 짜장면은 배가 고플 때 횡재한 듯 얻어먹는 음식이죠. 저에겐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인 것입니다.” 작가는 “평소 감탄을 아끼지 않는 백자에 대한 우리의 안목이 주입식 교육과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교육을 통한 일방적 접근이 본질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백자처럼 전시된 짜장면 그릇들은 플라스틱 식기와 백자의 경계에서 관람객들의 사고를 뒤흔든다. 그릇은 좌대 위에 있지만 정면에서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드러움과 준수함, 소박과 질박의 미가 끝없이 녹아내리면서도 일상적인 넉넉함과 편안함을 자아낸다. 노씨는 내년 봄 고려대 박물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 예정이다. (02)395-322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